[그의 서재] "우리는 누구나 역사 앞에 선다"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의 『역사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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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8-24 09:31   수정 2020-09-15 16:57

[그의 서재] "우리는 누구나 역사 앞에 선다"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의 『역사 앞에서』

오피니언 리더들은 살아오면서 어떤 책에서 영감을 받았을까? 그 영감은 그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갈등도 다양해지고 있는 지금, 그들이 `현재`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휴대폰만 들면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 홍수의 시대에 그들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위해 오피니언 리더들의 마음 속 서재를 엿보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책을 읽고 싶어도 시간에 쫒겨 읽을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오피니언 리더에게 영감을 준 책의 중요 포인트를 정리했다. 짧은 글을 보고도 비슷한 감동을 느꼈다면 책을 구해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들이 느낀 영감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기를...





이인용 삼성전자 CR담당 사장이 『역사 앞에서』라는 책을 읽은 것은 MBC기자 시절이었다. 1982년 MBC기자로 입사한 그는 2005년 삼성전자 홍보팀장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23년동안 기자로 지냈다.

기자 시절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 십여 년이 지난 후에 다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였다. 당시 이 사장은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 팀장(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역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 있음에도 집단 속에서 그 내부를 흐르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은 유사한게 많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또 1966년부터 10년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 혁명`을 언급하며 "인간이 왜 전체주의 속에 빠져드는지, 인간의 사고 체계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권력지형이 바뀔 때 지식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 아주 유사한 면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 사장은 또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상황과도 비슷한 점이 많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이 사장은 지인과 후배기자를 비롯해 직원들에게도 책을 많이 나눠주는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폭염으로 뜨거웠던 지난 6월 어느 날 그 책은 내게도 전해졌다.



『역사 앞에서』는 역사학자 김성칠(1913년 경북 영천生)이 광복 이후 부터 한국전쟁 초기의 사회상을 지식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보고 겪은 내용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다. 책을 읽다보면 `실제 겪은 일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소설을 읽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각 장면이 영화처럼 그려진다.

이 책은 전란 중에 태어난 김성칠의 셋째 아들 김기협이 아버지를 따라 역사학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부친의 일기를 책으로 엮어 1993년 초판 발행됐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1년 뒤에는 KBS에서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후 2009년에는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인 정병준 교수의 해제가 추가된 개정판으로 출간됐고, 지난 2018년 기존 출간물에서 빠진 일기의 내용을 살린 판본이 또 나올 만큼 꾸준히 읽히고 있는 책이다.

몇 해 전 여름, 이인용 사장은 이 책을 삼성전자 직원들에게도 읽어보기를 권했다. 이 사장은 이 책을 권하면서 직원들에게 "인간은 이념을 만들고, 이념은 체제를 만든다. 체제는 인간을 그 안에 가둔다. 인간은 체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 삶의 축적이 역사를 이룬다. 그래서 인간은 매 순간 역사 앞에 선다"라고 말했다.



■ 책으로 들어가면

- 70년 전에도, 오늘도 바뀌지 않는 `진리`



2018년 발간된 판본의 첫 일기는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1945년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날로부터 석달 정도 지난 1945년 11월 29일.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재건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있다. 75년 전의 일인데도 지금의 우리 사회가 새겨들어야 할 조언들이다.







당시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도 눈에 띈다. 특히 자주 오지 않는 전차를 타기 위해 서울 시민들이 필사적으로 전차를 타려는 모습에 대한 기록은 단순히 사회기반시설 확충 같은 행정적인 문제를 넘어서 시민들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정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광복 이후 6.25 이전까지 비교적 평안한 세월이 이어진 덕인지 김성칠의 일기는 대부분 학문에 정진한 내용으로 채워지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950년 6.25일 이후로 넘어가게 된다. 38선을 넘어온 인민군이 김성칠이 사는 서울에 닿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란을 가지 못한 김성칠과 그의 가족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졸지에 인민공화국의 국민이 됐다. 하룻밤 사이에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들의 지위도 정반대로 바뀌었다.



인민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서울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져갔고,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는 이들도 많았다. 사유재산이 정부에 귀속되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하루아침에 살던 곳을 내줘야하 일도 다반사였다. 또 `계획경제`라는 미명아래 그나마 지킨 개인 소유의 땅에 나라가 지정한 작물을 심어야 하기도 했다.





책에 의하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있는 서울대 교수들도 사상과 체제의 변화 속에서 이렇다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교수들 집단에서 새롭게 주도자가 된 한 교수는 교수들도 모두 의용군에 지원해야 한다고 재촉했지만 그 어떤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인민 치하아래서 사상검증에 통과하지 못한 김성칠은 학교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하고 숨어사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러는 동안 좌익혐의로 학교에서 떨려났던 사람은 승승장구해 요직을 차지하고, 일부 우익 세력조차도 좌익과 연결된 작은 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잡고 새 물결의 흐름에 합류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세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민군들이 말로만 떠들던 세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닿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8시간 노동제, 성별·국적 불문 균일 임금제, 노동 보험제, 임신부 보험제 같은 온갖 개혁을 한다고는 했지만 실은 `선동`일 뿐이었고 김성칠은 적었다.





결정적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성공하면서 서울의 인민군들은 점점 후퇴했고, 3개월의 인민군의 통치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갔다. 전쟁터로 전락한 서울은 그 상처를 고스란히 끌어안아야 했다.







결국 3개월만에 김성칠은 다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 1년새 일제의 국민이었다가 광복을 맞아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가 6.25로 조선인민공화국의 국민이었다가 다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된 것이다. 그의 의도와 전혀 별개의 것이었다.



사상과 체제가 다시 바뀌어지만 그 안에서 권력을 잡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다시 학교에 나갈 수 있게 된 김성칠은 새롭게 교수 심사를 받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권력을 차지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을 또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한다.









일기는 1951년 4월 8일 아내와 함께 아이들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적어도 아미치스의 『사랑의 학교』 (원제는『꾸오레』 Cuore)에 비길만한 하나는 후세에 남기기로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마무리 된다. 그들의 계획을 실천할 시간도 없이 그해 10월 김성칠은 그의 고향 경북 영천에서 괴한의 습격으로 생을 마감한다.



(▲ 『사랑의 학교』는 이탈리아의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1886년에 발표한 아동문학. 원제 Cuore는 이탈리아어로 마음, 심장을 뜻한다. 초등학교 4학년인 엔리코가 학교와 집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일들을 일기에 적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체제의 빠른 변화 속에서 `한계`를 드러낸 당시 언론의 모습들

김성칠의 일기에는 당시의 전쟁의 참상과 사회상 외에도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그의 입맛에 맛게 논조가 바뀌는 신문과 방송 등 편향된 언론을 지적한 부분도 상당수 등장한다.

이 사장은 "책의 어떤 한 부분을 주목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점(책이 기자에게 건내질 시점)에서 다시 이 책이 떠오른 것은 `저널리즘`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인용 사장이 말한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 있음에도 집단 속에서 그 내부를 흐르는 본질적인 인간의 모습은 비슷한 면이 많다"는 점을 당시 언론 보도 행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장은 "디지털 시대에 저널리즘이 설자리가 없다고 고민하는 언론과 기자들에게 `본질적으로 좋은 콘텐츠`의 가치는 결코 소멸하지 않고 `바이러스`처럼 퍼진다"며 가치가 오히려 높아진다"고 강조했다.



■ 그의 서재에는 또...

이 사장이 후배 기자들에게 많이 선물하고 자주 언급하는 또 다른 책 중에 하나가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 스쿨 새뮤얼 프리드먼 교수가 쓴 『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 라는 책이다.

`저널리즘 입문서`라고도 알려진 이 책은 1997년 미국 기자협회 `올해의 저널리즘 교육자 상`을 받은 책이기도 하고 국내에서 언론학자들이 언론학도들에게 교과서처럼 활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사장은 특히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저널리즘의 임무`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 책의 번역본이 국내에 나오기도 전 한 지인은 이 사장에게 "저널리즘과 관련해 당신이 평소에 하던 이야기가 여기 다 들어있다"며 원고상태 그대로 번역본을 전했다. 이 사장이 『미래의 저널리스트에게』라는 책의 한글판 1호 독자인 셈이다. 이 책을 읽고 프리드만 교수와 사랑에 빠진 그는 그후 10년 후 후배들에게 그 감동을 나눌 기회를 마련한다.

이 사장이 삼성언론재단에 권유해 지난 2018년 새뮤얼 프리드먼 교수를 초청해 `디지털 시대의 저널리즘 윤리`라는 주제로 저널리즘 컨퍼런스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프리드먼 교수의 강의를 들은 현직기자들은 그의 강의에 감동 받아 말진기자부터 심지어는 편집국장까지 그와 사진을 찍기위해 줄을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이 사장도 특히 그의 강연의 마지막 문장을 몇 차례나 다시 읊을 정도로 감동받았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새뮤얼 프리드먼의 책들을 가리키며 우리는 왜 우리 후배들에게 이런 책 한권 남겨주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먼 훗날 그의 다음 행보를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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