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도 반한 면도기 회사…반도체 전쟁서 '빛났다' [한입경제]

김종학 기자

입력 2021-05-14 17:45   수정 2021-05-2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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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의 실리콘 밸리 만든
    ASML와 NXP 모태, 필립스
    전구에서 반도체까지 혁신
    삼성보다 10년 앞서 투자


    = 한국인들에겐 박지성, 이영표가 활약한 구단 이름으로도 유명한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이 전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인한 수혜지역으로 떠올랐습니다. 초미세 공정용 노광장비 업체인 ASML, 차량용 반도체 생산 1위 업체인 NXP가 바로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주에 위치한 아인트호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죠.

    지난해 2분기 팬데믹으로 바닥을 쳤던 제조업 수요가 살아나면서, 반도체, 철강 강판 등 제조기업마다 원료 부족에 몸살을 겪고 있지만 이들 두 회사만큼은 예외입니다. 그런데 삼성도 TSMC도 미처 발을 들이지 못한 시장을 쥔 두 기업은 어떻게 탄생한 걸까요?

    ● 네덜란드의 자존심…130년 전구 회사가 모태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의 기원은 130년 역사를 가진 전구 회사, 필립스에서 출발합니다. 필립스가 사업을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떼어낸 회사가 전 세계를 주름잡는 기술기업으로 재탄생한 것이죠. (현재 필립스는 가전, 전구까지 매각하고 헬스케어 사업만 주력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에어프라이기`, `전기면도기`로 더 익숙하지만 필립스는 본래 1891년 필라멘트 전구를 모태로 탄생한 가전업체입니다. 에디슨의 GE와 경쟁하며 유럽 최대 전구 회사로 성장해 전쟁 중에 시작한 X선, 진공관라디오 이후 TV, 음향 가전 등으로 80년대까지 소니와 가전기기 시장을 양분해왔죠.

    시장을 확장하던 필립스는 의료장비, 전자기기에 쓰일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 일종의 시스템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최초의 집적회로 설계업체인 시그네틱스를 인수하는데 이때가 1975년. 한국, 대만보다 10년이나 앞선 때입니다.

    이후 필립스 반도체는 1985년 유럽 최대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지만, 인텔, 삼성전자 등 경쟁 업체가 뛰어들고 설계와 연구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경쟁으로 적자가 누적되는 한계에 부닥칩니다. 필립스가 이를 계기로 1984년 `빛`을 이용한 노광장비 사업을 ASM 인터내셔널에 넘겨준 회사가 지금의 ASML, 2006년 사모펀드 KKR에 넘겨 독립시킨 회사가 NXP입니다.



    ● 기술경쟁에 밀린 뒤 기사회생…독보적 1위
    극자외선을 이용한 노광장비 100%를 독점한 ASML은 시가총액 242조, 삼성전자와 TSMC의 최대 파트너로 유명하죠. 같은 모회사에서 떼어져 나온 NXP 역시 독립한 뒤의 성과는 눈부실 정도입니다. 지난해 기준 차량용 반도체 시장의 21%로 1위, 그 뒤를 독일의 인피니온(19%), 일본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15%),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14%)가 잇고 있습니다.

    NXP는 2천년대 반도체 치킨게임에서 밀려나 45nm(나노미터)급 하급 사양의 반도체, 센서밖에 만들지 못했지만, 5nm급 이하 초미세공정 투자도 벅찬 삼성전자, TSMC의 빈자리를 메우며 존재감을 키운 회사입니다. 나아가 2015년엔 모토로라의 프리스케일을 18조 원에 인수해 이를 바탕으로 애플페이 등 근거리무선통신칩, 사물인터넷용 칩을 생산하는 종합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난해 2분기 팬데믹으로 인한 수요 급감에 고전하던 NXP는 예측과 다른 반도체 대란 속에 올해 1분기 매출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27% 증가할 만큼 압도적인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전기차 공급 증가와 맞물려 최근 2년 사이 주가가 2배 이상 올라 시가총액은 58조원, 사상 최대를 기록 중입니다.

    NXP는 현재 토요타, 포드뿐 아니라 전기차 선두주자인 테슬라까지 2,500개 차량 제조업체에 공급하고 있어, 공급부족이 완화되는 내년에도 가파른 성장이 가능한 기업으로 꼽힙니다.



    ● 격화된 반도체 전쟁…삼성전자가 정말 인수할까
    NXP가 올해 새삼스레 더 주목을 받는 것은 미국의 참전으로 격화된 반도체 전쟁에서 파트너로 삼기에 최적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NXP는 이미 2018년 미국 퀄컴이 470억 달러, 50조원을 들여 인수를 시도하다 당시 미중 갈등 여파로 중국이 반대해 무산된 전례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NXP를 인수한다면 차량에 쓰이는 핵심 프로세서 개발 능력, 인포테인먼트 하만과 시너지를 더해 이 시장에 최대 사업자로 급부상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나오는 겁니다. 이미 삼성전자가 올해 초 콘퍼런스콜에서 "3년 안에 의미있는 인수합병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 추측성 인수설이 끊이지 않고 있죠.

    현재 유난히 몸값이 오른 기업, NXP는 지난 13일 기준 시가총액 58조원을 기록 중입니다. 배런스가 인용한 JP모건의 분석이 사실이라면 삼성전자는 프리미엄을 붙이더라도 보유현금 100조 원, 동원 가능한 단기 현금으로 인수합병을 시도할 여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분석이 현실화되기까진 넘어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에 필요한 ADAS(첨단 운전자 보조시스템) 탑재 수요가 늘어 차량용 반도체가 각광을 받지만 개별 수익성은 매우 낮은 대표적 기술입니다. 메모리반도체 치킨게임에 집중한 삼성전자와 여타 기업들이 투자에서 발을 뺀 이유이기도 하죠.

    대부분의 차량용 반도체가 구식 반도체 기술인 8인치 웨이퍼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3nm, 5nm급 고성능의 초미세공정의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한 경쟁, 초격차 확보 전략과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현재 전세계 반도체 공급 형태별로 보면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가 약 절반, 전장용 반도체, 가전용 반도체가 각각 10%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옴니아 조사는 이 가운데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 약 450억 달러(약 50조원) 규모이던 것이 5년 뒤 670억 달러, 약 75조원 규모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합니다. 작고 수익성 낮은 시장에서 1등이 된 네덜란드 기업의 잠재력을 마냥 외면하기엔 시장 성장 속도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팬데믹 이후 플랫폼 기업의 성장과 빅데이터, 인공지능 기술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 개발 경쟁에서 미국, 대만, 네덜란드까지 각국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입니다. 우리 정부도 다소 늦었지만 오는 2030년까지 510조원, 삼성전자 홀로 171조원을 들여 반도체 기술 개발에 전폭적인 투자를 진행하기로 한 배경입니다.

    당장은 구체적인 방안은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경쟁에 반 걸음이라도 앞서기 위한 인수합병이 머지 않은 듯 보입니다. 비메모리 기술경쟁에서 더 많은 경쟁자를 상대해야 하는 우리 기업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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