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맞는 옷 찾다가 테일러 됐어요..이젠 외국에서 찾는 K테일러 권영호 대표

입력 2022-03-10 15:10   수정 2022-03-1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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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을 나와 바다로..청개구리가 된 테일러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이탈리아 양복샵 취업에 도전하다
공부와 일을 병행한 뚝심, 현지인들에게 인정받다
양복아카데미로 K-테일러의 길을 걷다
매일 운동만하는 청년이 있었다. 명문체대를 가기 위해 보디빌딩 특기생 준비를 수년간 했지만 유리천장임을 깨닫고 일찌감치 해병대 부산관으로 자원입대했다. 군생활과 함께 야간대학교에 진학해 학업에도 정진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없었다.

되는대로 열심히만 살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10여년 만에 지금은 강남 노른자 땅에 자신의 맞춤양복점을 내고 외국에서 찾아오는 교육생들을 지도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둑스엘레간띠에 권영호(유럽비스포크 테일러양성학원) 대표의 이야기다.K테일러 권영호 대표/둑스엘레간띠에(우)

친구 소개로 우연히 만난 양복
군 제대 무렵, 양복 한 벌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침 양복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찾았다. 보디빌딩을 했던 몸이라 왠만한 기성복은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양복점에서 일하는 기술자 한 명이 그에게 양복기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본 것이다. “내가 양복을 만든다고?” 처음엔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실제 양복을 만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한 번 해볼까?” 가볍게 생각했던 그 순간이 평생업이 될 줄이야.. 그때는 몰랐다.

새벽엔 헬스장 아르바이트, 오후엔 무보수 양복점 사원
양복업계 현실은 냉혹했다. 기술을 배워야 할 수 있는 업종인데 녹녹한 환경이 아니었다. 월급을 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정도로 ‘돈 받을 생각 말고 기술부터 배워라’ 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결국 무보수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먹고는 살아야했기에 배운게 운동밖에 없었으니 헬스클럽에서 파트타임 일을 병행해야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부터 12시까지 일하고 곧바로 양복점에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일이 반복됐다. 두더지가 새벽녁에 굴속에 들어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밖으로 나오는 형세랄까? 2013년의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다.

스물일곱 살.. 날기 위해 뛰어내리다이태리 양복점에서 근무했던 권영호 대표(맨 좌측)
청년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고작 27살. 또래 친구들은 아직도 대학교에서 책과 씨름하고 있거나 취업을 준비 중이겠지만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우선 주먹구구식으로 기술을 배워야 하고, 그것마저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것도 국내가 아닌 이탈리아행이었다.

맞춤양복 세계에 들어섰으니 유럽으로 가서 제대로 배워서 최고가 되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욕망은 그저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허상이었다. 언어도 되지 않는 젊은 동양인이 양복기술을 배우겠다고 하니 거들떠보는 하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기술 배우려면 말부터 배워와”라고 말해주는 이는 그나마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당장에 언어부터 시급했다. 동면에 들어가는 곰이 됐다. 3개월간 칩거하며 언어공부에 몰입했다.

일단 보고만 있어라
3개월 동안 언어공부만 죽어라 하니, 왠지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무작정 이탈리아 양복거리로 나가 우연히 잡지에서 보게 된 양복점의 문을 두드렸다. 무조건 일할 수 있는지 물었다. 아니, 졸랐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No` 였다. 그 곳은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양복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굴할 것 같으면 아예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의지만은 꺾이지 않았다. 거절당하면 또 오고 또 오고를 반복하자 결국 마에스트로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사실 전에 근무했던 일본인이 속을 썩여 동양인을 받지 않으려고 생각했었는데 그의 의지에 감복했기 때문이란다. 뛸 듯이 기뻤다. 세상을 다가진 듯 했다. 그 순간만큼은 기뻤다.

하지만 그곳도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익혔던 양복기술과 경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애송이 취급을 당했다. 처음 받게 된 지시도 ‘일단 보고만 있어라’ 였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또한 과정이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한 달 정도는 열심히 하라는대로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 것도 한계에 다다르니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돈을 써가며 버티고 있는 터라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래서 일이 끝나면 잠자는 것을 줄이고 집에서 옷을 만드는 연습에 열중했다. 한 달 후, 바지를 만들어 볼테니 맘에 들지 않으면 나가겠다고 배수진 쳤다. 결과는 합격. 그가 만든 바지를 본 주인은 흡족해 한 것이다. 그때부터 정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400km를 달려가 공부하다
로마에서의 원하던 일자리는 찾았지만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비자문제도 해결할 겸, 400km나 떨어진 밀라노 패션학교에 등록하게 된다. 매주 금요일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1년 반 동안 통학을 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독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다 보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차례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버텨보자’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자 보람 있는 일도 생기기 시작했다. 양복업계에서 꽤 명성이 있는 테일러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성실함을 알아본 그들이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면서 자연스레 인맥이 넓어졌다. 업계 사람들을 알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들의 기술도 습득할 수 있었다. 햇병아리 동양인이었지만 ‘권영호’라는 이름 석자가 외국인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양복 한 벌을 만들려면 디자인,재단,가봉 등 여러 과정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각 분야마다 전문가가 다르고 서로의 영역침범을 극히 경계한다. 그만큼 보수적이다. 온전히 기술을 익히려면 저임금에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내야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달랐다. 처음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경계했지만 성실함을 보여주니 기술 전수에 날을 세우지 않았다.

1년 반 동안 일하면서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열심히 일하면서 공부까지 병행했던 자신 덕분인지는 몰라도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일 잘하기로 소문나 현지 취업도 잘된다며 은근히 자부심을 내비쳤다.

양복의 본고장, 영국 세빌로우에 가다
이탈리아에서 약4년의 경험을 마무리하고 최종 목적지인 영국으로 떠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복점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그곳엔 ‘새빌로우’라는 거리가 있었는데 유명한 양복점들이 밀집한 거리였다. 영화 <킹스맨> 촬영지로도 알려지면서 관광객들도 늘 북적였다. 새빌로우에서 유일하게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양복점에서 한국인 최초로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그동안의 경력을 인정받자 테일러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됐다. 영국 귀족과 고위 관직자의 수트를 만들며 경력을 쌓게 되었고 대표의 권유로 강사활동도 하며 힘들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생활했다.

다시 한국.. 유럽식 양복교육 아카데미를 열다둑스엘레간띠에(유럽비스포크테일러 양성학원/강남소재)
권대표는 건강의 문제로 이탈리아와 영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5월경 귀국했다. 5년 전 출국할 때의 풋내기 동양인이 아닌 전문 테일러로 고국 땅을 밟았다. 영국의 유명 양복점 근무와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에서의 강사생활은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귀국한 이후 시작한 일은 양복기술을 전수하는 아카데미 (둑스엘레간띠에-유럽비스포크테일러 양성학원)사업이었다.

강남구에 위치한 이곳은 영국 및 이탈리아 비스포크 테일러링 교육과정을 전수하는 아카데미다. 이곳에선 체형별 양복의 이해, 패턴, 재단, 손바느질, 그리고 가봉,메이킹,마도매 등 전반적인 교육을 전수하고 해외마스터테일러 초청강의까지 진행하고 있다.

둑스엘레간띠에 내부모습(유럽비스포크 테일러 양성학원)이미 많은 양복점들이 성업 중이라 바로 판매업을 시작하는 것 보다는 이탈리아에서의 강사경험을 살린 교육사업에 승부를 건 것이다. “기술만 있다고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라는 친구의 조언에 홍보부터 주력했다. SNS와 블로그 먼저 시작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뒤따랐다.

유럽양복기술을 배워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첫 사업설명회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홍보했지만 이미 양복업을 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성공적이었다.

특별한 시작, 외국인도 찾는 K-테일러외국인에게 양복기술을 가르치는 권영호 대표
코로나를 감기로 인식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만큼 감염자수가 심각한 상황이었던 2022년 1월, 권대표는 아카데미가 위치한 건물 1층에 샵까지 열었다.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느꼈던 성공 가능성이 확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초기에는 국내인이 대부분이었지만 조금씩 입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외국인들까지 찾아왔다. 아시아지역에서 유럽 양복기술을 전수하는 유일한 곳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태국인부터 처음 연수를 받으러 들어오더니 대만,중국,캐나다 등으로 국적이 다양해졌다. 유럽으로 가고 싶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거리도 멀어 주저하던 차에 한국행을 택한 것이다.

유럽비스포크 테일러양성과정(AASE)수료생과 함께권대표는 우물 안을 벗어나 바다를 건넜고 그곳에서 해외기술을 익혔다. 지금은 오히려 외국인을 가르칠 정도가 됐다. 하지만 그에겐 또 다른 꿈이 생겼다. 단순히 양복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넘어서 해외 취업까지 연계시키는 일이다. 한국에서 유럽 기술을 익힌 후 현지에 취업 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수적인 국내 교육현실에 실망감을 느꼈고 과감하게 해외로 건너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됐으니 노하우를 전수하고 취업까지 도와주는 것이 소명이라고 말한다. K-테일러의 탄생이다.

이제는 전통이 바뀌어야 할 때둑스엘레간띠에 권영호 대표-유럽비스포크 테일러양성학원(우)
우리나라와 유럽 옷의 차이를 물었다. 그는 “옷의 느낌이죠, 이태리는 화려한 느낌이라면 영국은 젠틀하고 클래식한 느낌이죠. 이는 한국 정장이 뒤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아직까지 한국 정장이 세계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옷 만드는 손기술만큼은 우리도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제가 경험했으니까요.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 양복에 해외 기술과 경쟁력을 입히고 세계에 알리는 일은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제가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며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K-팝도 따지고 보면 해외에서 시작됐지만 우리의 정서로 승화시켜 대중을 열광시킨 것이다. 그가 말하는 K-테일러도 의미가 상통한다. 유럽의 양복기술이지만 우리의 손을 거쳐 세계인들에게 전파되기에 K-테일러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권대표는 “저희는 끊임없이 연구합니다. 봉제기술도 중요하지만 요즘은 패턴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요구가 늘 변하기 때문에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고 그 안에서 배출된 전문가들이 세계로 흩어져 기술을 전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K-테일러라는 브랜드가 완성이 되는거죠” 라고 말하며 살며시 미소지었다.

K-테일러를 넘어 K-패션을 주도
권대표는 유럽 양복기술 전수와 매장 운영, 그리고 양복 부자재까지 유통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교육사업까지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욕심은 개인의 사업성공 뿐만 아니라 침체된 대한민국 패션산업, 나아가 양복산업을 다시금 일으킬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이제 K-테일러를 넘어 K-패션을 주도할 ‘제2의 앙드레 김’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둑스엘레간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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