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50조원+α`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 정책을 발표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회사채 시장 내 불안감은 여전하다.
주요 큰손 기관들의 곳간이 말라붙고 위축된 투자심리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높은 신용등급의 공사채마저 계획한 금액을 다 채우지 못한 채 발행이 취소됐으며, 일부 기업은 채권 발행 시기를 늦추는 등 시장 경색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2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은 애초 이번 주 달러화 신종자본증권 수요예측을 할 계획이었으나 일정을 다음 달로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발행하는 채권에 대한 수요는 비교적 견조했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정책과 금리 인상이 장기화할 것이란 예상 속에 국내 기업들도 발행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특히 신종자본증권의 경우 선순위채보다 시장 상황에 대한 민감도가 더 높아 흥국생명으로서는 지금처럼 시장 내 변동성이 확대됐을 때 발행에 나서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날 우량 공사채에 속하는 AAA등급의 한국가스공사[036460] 채권과 AA+등급의 인천도시공사 채권이 각각 2년물과 3년물(그린본드)에서 예상한 규모만큼 투자자를 찾지 못해 발행이 취소된 것도 시장 경색이 여전함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날도 AAA등급 공사채인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전력공사가 각각 2년물·3년물 투자자 모집에 나섰지만, 두 기업 모두 3년물이 목표금액을 채우지 못하고 유찰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들어서만 23조원 넘게 발행된 한전채는 은행채와 더불어 최근 회사채 시장 경색의 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등급이 높은 한전채와 은행채가 과도하게 발행량을 늘리면서 그나마도 얼마 안 되는 시장 내 수요를 흡수해 다른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업계는 오는 27일 교보증권[030610]의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을 앞두고 우려스러운 전망을 하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담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증권업은 건설업과 더불어 최근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위험이 불거진 업권인 데다 발행시장 분위기도 워낙 냉랭해서 좋은 결과를 예상하긴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지난 주말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도입,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가동, 유동성 부족 증권사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정책을 발표했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아직 냉담한 셈이다.
김상훈 하나증권 연구원은 "채안펀드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투자하는지 알 수 없어 시장에서도 좀 더 지켜보자는 것 같다"며 "아직 매수심리가 살아나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김기명 한국투자증권 연구원도 "어제까지도 (정부가 발표한)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안 들렸다"면서 "시장은 실제로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설명했다.
계절적 요인도 현재의 시장 경색에 한몫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산운용사 리서치센터 관계자는 "4분기는 각종 기관투자자가 북 클로징(book closing·회계 연도 장부 결산)에 들어가기 때문에 매수를 안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산업은행 등이 은행채를 대거 발행하면서 공급 부담이 생긴 상황"이라며 "같은 AAA등급이라도 공사채보다 은행채 금리가 훨씬 좋기 때문에 기관투자자로서는 굳이 현시점에 공사채를 매수할 유인이 없다"고 밝혔다.
시장 경색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지만 매일 수천억원 규모의 회사채 만기는 꼬박꼬박 도래하는 상황이다.
금융정보업체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이날 도래하는 회사채(ABS 포함·CP 제외) 만기 규모는 3천200억원에 달한다.
금리 상으로 투자심리가 크게 개선됐다는 징후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날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91일물 기업어음(CP)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8bp(1bp=0.01%포인트) 오른 연 4.45%로 연중 최고치를 경신했다.
다만 AA-등급 회사채와 BBB-등급 회사채 금리는 전 거래일보다 모두 6.4bp씩 떨어져 연 5.528%, 연 11.382%를 나타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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