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히트곡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가수 송민도가 지난달 28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1일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에 따르면 1923년생인 고인은 미국의 한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3∼4일 전 건강이 위중하게 악화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진 뒤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안남도 삼화보통학교와 서울 이화고녀(현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치고 만주 용정에서 유치원 보모 생활을 잠시 한 뒤 결혼 후 연길로 거처를 옮겼다. 1945년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송민도는 서울에 온 지 2년 만인 1947년 24세의 나이에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했다. 당시로는 아이를 둔 주부가 가수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척 이례적이었지만 남편이 먼저 제안해 용기를 냈다.
송민도는 이때 이예성, 원방현, 김백희, 옥두옥 등과 함께 방송국 전속가수 1기생으로 발탁돼 3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뒤 데뷔곡 `고향초`를 냈다. 그런데 당시 음반사에서 `송민도`라는 이름이 남자 같다며 본인에게 알리지도 않고 `송민숙`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고향초`는 이후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큰 인기를 끌었다.
박성서 평론가는 "송민도는 정작 `고향초`가 얼마나 히트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며 "3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중 남녀노소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겨웠다고 회고했다"고 전했다.
송민도는 부산 피난생활 중 만난 작곡가 손석우로부터 페티 페이지의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I Went to Your Wedding)을 번안한 `눈물의 왈츠`를 받아 취입했다.
서울 수복 이후에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위문공연 활동을 펼쳤다. 휴전 이후인 1956년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 `청실홍실`을 가수 안다성과 함께 불러 발표했다.
송민도는 `청실홍실`에 이어 `나 하나의 사랑`도 히트시켰다.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가사를 모티브로 삼아 영화와 소설이 만들어지며 고인의 대표곡으로 남았다.
고인은 1960년대에도 `목숨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서울의 지붕 밑`, `하늘의 황금마차`, `카츄샤의 노래` 등을 발표해 인기를 누렸다. `카츄샤의 노래`는 1960년 제작된 영화 `카츄샤`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송민도는 1963년 가수 남일해·고대원을 비롯해 무용단과 밴드 등을 거느린 `백만불쇼단`을 결성해 단장을 맡았다. 쇼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재정난으로 5년 만인 1968년 백만불쇼단을 접었다.
그는 1971년 미국으로 떠나 로스앤젤레스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했다. 2006년 KBS `가요무대` 1천 회 특집 출연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기도 했다.
트롬본 연주인으로 KBS 경음악단장을 역임한 작곡가 송민영이 그의 남동생이고, 1970년대 그룹 드래곤스의 키보디스트 서동헌이 장남이다. 그동안 서동헌이 미국에서 고인을 돌봐온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이 17년 전 출연한 `가요무대` 제작진은 올해 4월 그의 100번째 생일을 앞두고 `송민도 100세 특집`을 논의 중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별세로 추모 무대 형식으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박성서 평론가는 "송민도는 당시 `꾀꼬리 같은 미성`의 가수가 각광받던 시대에 허스키한 음색을 구사하며 가요계에 등장했다"며 "애상이 깃든 부드러운 저음과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고 설명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경제TV 디지털뉴스부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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