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사라진 글로벌의 꿈...K·금융의 각주구검(刻舟求劍)

최진욱 기자

입력 2023-03-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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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몰린 크레딧 스위스...일본·말레이시아, 글로벌 플레이어 도약


(크레딧 스위스 본사 / 사진 : 크레딧 스위스 홈페이지)

'도쿄 대참사'로 기록된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국가대표팀이 조용히 귀국했다.

스포츠 강국이라는 자부심의 한 기둥이었던 국가대표 야구팀의 졸전에 국민들과 야구팬들은 아예 'WBC'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수많은 진단이 쏟아지고 있지만 결국 "죄송하다"며 고개숙인 감독만 보인다. 세계 야구 흐름을 무시한 채 야구판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 장본인들은 책임론이 불거질까 숨죽인채 눈치만 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인정하기도 싫은 예선탈락이 확정되는 그 즈음에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이 벌어졌다.

UBS와 함께 스위스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양대 거인 가운데 하나인 크레딧 스위스(Credit Suisse Group AG)가 위기에 빠졌다. 1856년에 설립되어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한 크레딧 스위스는 유구한 역사와 막강한 자본력,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금융권에서는 글로벌 톱 티어(Top tier) 가운데 하나로 통한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경제·금융위기와 스캔들에서도 생존에 성공했지만 2021년 뜻밖의 사고를 만난다. 한국계 미국인 빌 황이 운용하는 헤지펀드 아케고스 캐피탈이 갑자기 파산하면서 그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경쟁 투자은행(IB)과 달리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크레딧 스위스는 4조원의 손실을 보았고, 전 세계 부유층 고객들은 파산 우려가 높아지자 '뱅크런(Bank Run)'에 동참하면서 은행은 치욕을 맛봤다.

최고경영자(CEO)의 사임과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급한 불을 껐던 크레딧 스위스는 지난해에는 마약자금 세탁혐의, 초거액부유층 고객의 정보유출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러시아 재벌(올리가르히)들과의 거래내역을 파기했다는 의혹까지 받으며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급기야 현지시간 14(화)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고한 지난 2021년, 2022년 재무제표에 '중대한 취약점(material weaknesses)'이 발견됐다고 실토하면서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15일 유럽시장 개장으로 크레딧 스위스의 시가총액은 90억 스위스프랑으로 소폭 반등했지만, 우리 돈 약 13조원에 불과하다. 국내 금융주 시가총액 1위 KB금융지주의 종가가 약 20조원 정도니까 크레딧 스위스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정부와 금융권은 또 다시 해외진출이라는 목표를 들고 나왔다. 좁은 국내에만 머물지 말고 해외로 나가 한국의 금융영토를 넓혀 보자는 취지인데, 이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내용이다. 글로벌 금융허브와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들겠다며 법까지 만들었지만 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규모나 능력 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금융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사진:영화 'Too big to fail' 캡처 / 민유성 회장, 리먼 브러더스 인수협상 장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산업은행이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하기 위해 최종 협상단계까지 갔지만 국내의 반대로 무산된 이후 K·금융이 한 단계 올라설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10년간 고생을 했지만 리먼 유럽,아시아 사업을 인수했던 일본 최대증권사 노무라 증권은 다시 해외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고,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금융그룹인 메이뱅크그룹은 스코틀랜드 왕립 은행(RBS)의 자본시장사업을 인수해 투자은행 부문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는 이번주 '제1차 금융산업 글로벌화 TF' 를 열어 해외 직접진출과 투자확대를 지원하고, 글로벌 투자자금이 유입될 수 있도록 금융규제를 재점검 하는 동시에 금융 분야에서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가 창출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인 만큼 정책비전을 명확히 설정하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늦었지만 정부의 인식이 바뀌고 목표를 가다듬겠다는 움직임은 고무적이다. 다만, 과거의 시행착오를 거울 삼아 단숨에 글로벌 금융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방안도 동시에 검토해야 한다.

좁디 좁은 국내에서만 경쟁하는 토종 금융회사와 경영자들도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생각을 버리고 승부를 걸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산업인 반도체와 핸드폰, 자동차와 조선, 철강과 화학산업도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한 투자와 적자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밀어붙인 인내의 결과였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과 함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서비스업의 대표산업, 금융산업에서 당장 글로벌 톱 플레이어가 나와도 빠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칼을 물에 빠뜨리자 배에 표시를 하고, 언덕에 도착해 표시했던 그 자리에서 칼을 찾았다던 한 사내의 이야기(각주구검·刻舟求劍)처럼 중차대한 시점에 나오는 시대착오적 행동은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다.

코리안 시리즈 우승에만 매달리며 '내수 스포츠'로 전락한 한국 야구가 일본 언론의 비웃음에 고개를 숙였다. K·금융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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