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큰 의미가 없거나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연말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주변에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 어린 아이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린 아이들은 어떤 선물을 받느냐도 중요하지만, 바로 “크리스마스 날”에 선물을 받는다는 점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돈 생각으로 머리가 찌든 어른으로서는 크리스마스 날이 무슨 대수냐, 며칠 더 기다려서 더 큰 선물 받으면 좋지 않은가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어린 아이의 “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소송 당사자들에게 시사해주는 지점이 있다. 돈 문제가 얽힌 민사소송을 대리하다보면 재판장이 조정을 진행해보면 어떠냐 권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는 소송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아도 일단 조정부터 해보라고 강권하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민사소송에서 조정이란 법원이 위촉한 조정위원 등과 함께 소송 당사자가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상호 수용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나가는 절차이니만큼, 소송 당사자의 양보와 타협이야말로 조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권리와 증거를 따져 승패를 판단 받는 판결과는 결이 다르다.
대체로 소송 당사자, 그 중에서도 돈을 달라는 입장인 원고는 조정에 대해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조정을 진행하는 만큼 소송 절차가 길어지는 문제도 있고, 원고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히 받을 돈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피고에게 양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양보가 뭔가 지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하는 것 같다. 필자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판결문으로 피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못박아두고 싶으니까 조정에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돈 문제라고는 해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 돈을 둘러싼 서로의 태도에 감정이 상해 인간관계가 파탄에 이른 경우가 많으니, 위와 같은 원고의 입장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민사소송을 왜 제기했는지 냉정하게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원고가 되어 소송을 제기한 주된 목적은 하나일 것이다. 피고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서다. 그리고 소송까지 온 상황은, 피고가 자발적으로 돈을 줄 의사도 없지만, 그럴 만한 형편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일 것이다. 게다가 공증된 차용증과 같은 집행증서가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문제가 되는 돈을 둘러싼 소송 당사자의 입장이 달라 다툼의 여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원고로서는 피고로부터 돈을 받아 어딘가에 써야만 하는, 그 돈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고가 소송에 승소하더라도 피고가 불복하여 항소심, 상고심을 진행한다면 여전히 돈을 받지 못한 상태임은 변함이 없다. 승소한 제1심 판결에 근거하여 피고의 재산에 대해 가집행하려고 해도 이 역시 피고가 다툴 수 있다. 어찌저찌 상소심 절차를 모두 진행하고 강제집행을 시도해도 피고의 재산이 적어 받아야 할 돈의 일부 밖에 못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버린다.
만약 조정에서 소송 당사자간에 합의하여 조정이 성립된다면 어떨까. 아마 원고로서는 일정한 금액을 양보하였을 것이고, 분할 지급 받는다던지 하는 식으로 돈을 받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원고가 마치 진 것도 같지만, 조정에는 민사조정법 제29조에 따라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이 있다. 그리고 재판상 화해는 민사소송법 제220조에 따라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 즉, 조정에서 소송 당사자가 합의하면 항소심, 상고심을 거치지 않아도 서로 불복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피고가 조정 내용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할 수 있는 근거도 된다. 원고가 견뎌내야 하는 기간이 대폭 단축되는 효과가 있다.
결국 원고로서는 피고에게 최대한 빨리 돈을 받아 필요한 곳에 그 돈을 적절히 써야하는 상황이라면, 특히 원고 역시 제3자로부터 돈을 빌렸다는 등의 사정으로 써야 하는 돈이 계속 불어나는 상황이라면, 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간 다음에 승소를 확정지어보았자 그 실익이 크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판결문에 피고의 어떤 책임이 있다는 판단이 쓰이고 판사의 도장이 준엄하게 찍힌다고 한들 그 돈을 실제로 받아낼 수 없다면 어떤 실익이 있을까.
돈이란 써야할 때 있어야 돈이라는 옛말처럼, 원고가 스스로의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확보할 수 있다면, 민사소송에서 조정은 판결보다 훨씬 빠른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돈이야 어찌 되더라도 오로지 피고의 책임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다는 목적이 아니라면, 감정을 한 번 가라앉히고 조정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바라자면 개별 재판부가 아닌 법원 차원에서 위와 같은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재판 지연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 좋을 것이다. 판사 인력 부족 등으로 재판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없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에게 신속한 절차 대응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법원이 나서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사원 변호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을 최우수로 졸업한 뒤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대법원 국선변호인(2023), 서울고등법원 소송구조(2023), 서울남부지방법원 국선변호인(2023), 서울북부지방법원 국선변호인(2023), 서울특별시 공익변호사/신길제1동 마을변호사(2023),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 사단법인 동물보호단체 헬프애니멀 프로보노로 참여하고 있다.
<글=법률사무소 퍼스펙티브 민사원 변호사>
한국경제TV 박준식 기자
parkjs@wowtv.co.kr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