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전쟁이 사실상 마무리 단계라고 시사하면서 국제유가가 하루 만에 8% 넘게 하락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중동 산유국 감산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오면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장중 고점 대비 역대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9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플로리다 도랄 골프클럽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난 9일간 세계가 본 적 없는 가장 강력하고 복잡한 군사작전을 수행했다"며 "이란의 모든 전력을 매우 완벽하게 소탕했다"고 밝혔다. 이보다 앞서 오후 3시경 CBS 방송 전화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은 거의 끝난 것(‘very complete, pretty much’)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고 밝혀 뉴욕 증시와 상품 거래 시장 분위기를 뒤집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이란 해군함 51척이 해저에 가라앉아 있다. 미사일 발사대는 90% 이상 사라졌고, 드론 발사대는 83% 줄었다"면서 "발사대에 미사일이 올라가면 5분 내에 해당 발사대를 정확히 타격했다"고 공습 과정을 설명했다.
열흘간 공습에서 이뤄진 타격 규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5000개 이상의 표적을 타격했다"며 "가장 중요한 표적 일부는 나중을 위해 남겨뒀다. 타격하면 전력 생산 등 재건에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뒤에나 달성할 것으로 봤던 지점에 벌써 와 있으며, 초기 계획보다 크게 앞서 있다"고 자평했다.
전 세계 물류 공급을 마비시긴 호르무즈 해협에 대해서는 "미 해군 함정이 다수 배치돼 있고, 세계 최고 수준의 기뢰 탐색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며 "해협은 안전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석유 공급을 방해하는 행위를 한다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수준으로 타격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 중 국제 유가 안정을 위한 대책도 공개했다. 그는 석유 관련 제재를 받는 나라들에 공급을 허용하고, 베네수엘라에 대해서는 1억 배럴의 원유를 확보해 정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에너지 공급망 재개 기대를 키웠지만, 종전 여부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날 공화당 하원의원들과의 간담회에서는 "여러 면에서 이미 이겼지만, 충분히 이기지는 못했다"며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어떤 역량도 장기간 갖지 못하게 될 때까지가 목표"라고 밝혔다.
전날 피트 헤그세스 전쟁부 장관이 CBS 인터뷰에서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밝혀 전쟁 장기화 우려를 낳은 것과 관련해 트럼프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의 시작이라는 의미"라며 발언을 두둔하기도 했다.
이란은 전날 최고지도자로 모즈타바 하메네이를 선출하고, 이란 혁명수비대 등이 충성 맹세와 함께 호르무즈 해협 봉쇄 방침 등 강경 대응 입장을 이어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대해 "실망스러운 선택"이라면서도 구체적인 입장은 공개하지 않았다.

◆ 이란, 호르무즈 봉쇄 지속…사우디도 해상유전 폐쇄
세계 석유 수송량의 5분의 1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에는 일주일째 유조선 등 1천여척의 선박의 발이 묶여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날 기자회견과 별개로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으며, 혁명수비대는 별도 성명에서 “내일부터 자국에서 미국·이스라엘 대사를 추방한 아랍 또는 유럽 국가의 상선은 자유롭게 통과할 권한을 줄 것”이라는 위협을 이어가고 있다.
원유 수송이 막히면서 중동 산유국의 감산도 잇따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는 해상 유전인 사파니야·줄루프를 폐쇄해 하루 200만 배럴 이상 생산을 줄였다. 사우디의 홍해 얀부항 파이프라인은 일 500만 배럴 수송이 한계여서 기존 수출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라크 역시 이번 전쟁의 여파로 원유 생산량의 70%가 이미 감소했고,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UAE)도 저장 탱크 포화로 잇따라 감산에 들어갔다. JP모건은 다음 주말까지 중동 지역 석유 생산 중단 규모가 일 400만 배럴 이상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G7 재무장관들은 이날 화상회의를 열고 전략비축유 방출을 포함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미국은 최대 4억 배럴의 공동 방출을 제안했으나, 의장국인 프랑스는 "아직 그 단계는 아니다"라며 에너지 장관급 회의를 10일 추가 개최하기로 했다.

◆ 3대 지수 장막판 급반등…유가 안정에 촉각
원유 공급이 재개될 가능성을 기대한 시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큰 반등을 보였다. 이날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장중 1% 넘게 하락했던 S&P500지수는 마감 1시간여를 앞두고 급반전해 0.8% 상승 마감했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239포인트(0.5%) 상승했고, 나스닥 종합지수는 엔비디아 등 반도체주 반등에 힘입어 1.38% 올랐다. 엔비디아는 이날 2.73%, 브로드컴이 4.6% 뛰었고 마이크론과 AMD가 각각 5% 넘게 올랐다.
미 10년물 국채금리는 장중 4.21%까지 치솟았다가 트럼프 발언 이후 4.10%로 내려앉았고, 달러 인덱스도 장중 0.7% 강세에서 0.2% 약세로 뒤집혔다.
향후 시장 흐름에 대해 월가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에드 야데니 야데니리서치 대표는 "투자자들이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예상하기 시작하면 약세장을 배제할 수 없다"며 "유가 충격이 지속되면 연준의 이중 책무가 인플레이션 상승과 실업 증가 사이에 끼이게 된다"고 경고했다.
반면 도이체방크의 헨리 앨런 전략가는 "본격적인 약세장으로 가려면 유가 급등이 수개월 이어지거나, 연준의 긴축 또는 실물경제가 눈에 띄게 무너져야 한다”며 “지난 주보다 상황이 나빠진 건 맞지만,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1970년대 오일쇼크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