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ESG는 말이 아닌 숫자의 영역입니다. 기업이 내는 숙제가 아니라 시장이 받아보는 성적표죠."
다음 달 금융위원회의 ESG 공시 로드맵 발표를 앞두고 시장의 관심은 도입에서 안착으로 옮겨가고 있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 당시 정부대표단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글로벌 탄소 규범의 출발을 지켜본 이옥수 김앤장 지속가능성·기후센터장이자 회계사인 그는 ESG 공시를 이렇게 정의했다.
17일 한국경제TV는 서울 종로구 크레센도빌딩에서 이옥수 센터장을 만나 ESG 공시 로드맵 제도 안착을 위한 면책 장치와 투자 판단 변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 센터장은 "ESG 공시 로드맵을 통해 글로벌 최소기준을 맞춰 코리아 디스카운트 리스크는 해소됐지만, 코리아 프리미엄을 위한 방안은 계속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ESG 법정공시의 핵심은 처벌이 아니라 연착륙이며, 그 출발점은 넉넉한 면책조항"이라고 강조했다.
Q. ESG 공시 로드맵이 곧 발표되는데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A. 모두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운 주제지만, 발표 자체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제도 도입이 계속 지연되며 불확실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미 ESG공시 로드맵 발표를 끝내고 시행 중인 나라가 대다수입니다. 유럽은 이미 시작했고, 호주와 중국은 올해부터, 일본과 대만도 내년 도입을 앞두고 있습니다. 아시아 주요국들이 먼저 움직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임계점에 도달한 셈입니다.
이번 로드맵 발표로 우리 기업들도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흐름에 맞춘 한국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이라는 공식적인 언어를 갖게 됐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가 기후 주제부터 의무화를 시작하는데, 앞으로 생물다양성(올해 10월 초안 발표 예정)과 인적자본 등으로 공시 범위는 순차적으로 커질 것입니다. 결국 이번 로드맵을 통해 글로벌 최소 기준을 충족함으로써 코리아 디스카운트 리스크는 어느 정도 해소했습니다. 다만 이제 막 출발선에 올라선 단계라 코리아 프리미엄을 만들기 위한 전략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Q. 그렇다면 제도가 안정적으로 안착해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가기 위해선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할까요?
A. 모든 오류를 법적 책임으로 연결시키면 기업 부담이 과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ESG 분야는 추정치와 불확실성이 큽니다. 이에 따라 ESG 공시에는 더욱이 세이프하버, 즉 면책조항을 폭넓게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온실가스 배출량입니다. 기업은 사업보고서를 3월에 제출해 공개하지만, 배출량은 정부가 6월에 최종 확정합니다. 이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확정되지 않은 수치를 먼저 공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이후 수치가 바뀌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잘못된 공시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핵심은 기업 부담을 어떻게 줄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동시에 코리아 프리미엄은 기후라는 최소 기준을 넘어서 업종별로 중요한 ESG 이슈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반영할 수 있냐에 달려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연자본, 정보보안 등 업종마다 더 중요한 이슈들이 있거든요. 어떤 기업은 기후보다 인적자본이 훨씬 중요할 수 있고, 또 어떤 기업은 정보보안이 핵심일 수 있으니 각 산업과 기업 특성에 맞는 ESG 이슈를 얼마나 정교하게 반영하느냐가 코리아 프리미엄을 좌우할 것으로 봅니다.
Q: ESG 공시가 투자 판단에 어떤 변화를 줄까요?
A: ESG 공시가 2028년부터 의무화라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투자 패러다임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는 재무정보 중심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했지만, 그걸로는 기업의 리스크와 경쟁력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환경 사고, 인권 문제, 지배구조 이슈 등 사전에 파악하기 어려운 것들이 실제 기업 가치에는 큰 영향을 주는 데 말이죠. 추가로 인적 자본이나 기술력 같은 요소도 중요하지만 기존 재무정보에는 잘 반영되지 않습니다. 누가 S급인재인지 아닌지 명확히 수치로 판단하기 어렵잖아요.
ESG 공시가 정착되면 비교할 수 있는 데이터가 축적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평가 모델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는 ESG 정보가 기업마다 제각각 기준으로 작성되다 보니 비교 가능한 데이터가 거의 없고 지속가능성 보고서나 ESG평가도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얻기보단 의구심만 키웠죠. 앞으론 ESG공시로 기준이 세워져 투자 의사결정에 제대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관투자자 중심으로 활용되겠지만, 점차 개인투자자까지 확산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Q. ESG 공시 도입과 함께 필요한 정책적 보완과 기업 대응 과제는 무엇인가요?
A. 우리나라는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처럼 탄소 배출이 큰 업종이 많습니다. 이런 기업들은 현재 불황 속에서 ESG 대응까지 이중고를 겪고 있죠. ESG 공시에 더해 체감할 수 있는 유인책을 줘야 합니다. 한국형 녹색전환(KGX)이나 기후금융처럼 전환을 지원하는 정책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느냐가 핵심이겠죠. 기업들의 ESG 부서가 단순히 비용을 집행하는 조직이 아니라 정부 지원을 끌어와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로 바뀔 수도 있고요.
기업들에겐 공급망도 ESG 공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유럽의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미국의 위구르 강제노동 방지법(UFLPA)처럼 글로벌 규제는 이미 공급망 전체를 점검하는 방향으로 이동했습니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고객사로부터 재생에너지 사용 여부, 탄소 배출 데이터, 공급망 인권 기준 등을 요구받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특히 변압기·전선 등 전력 인프라 기업이나 자동차 산업처럼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업종에서는 이러한 요구가 현실화한 상황입니다. 현재 국내 글로벌 기업들은 공시 대응에 그치지 않고 생물다양성 등 새로운 ESG 의제까지 선제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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