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하고 집에 와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오후 회의가 다시 시작된다.
‘그때 왜 그렇게 말했지?’
‘팀장님이 그 말을 한 건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너무 아는 척했나?’
이미 끝난 회의인데 머릿속에서는 2차 회의, 3차 회의가 열린다. 심지어 회의 시간에는 생각나지 않았던 기가 막힌 답변이 밤 11시가 되어서야 떠오르기도 한다. 직장 관련 스트레스 하면 진료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 중 하나다.
별일 아닌 거 아는데 계속 생각난다는 것을 본인도 안다. 지금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을. 그런데 생각을 멈추려고 하면 오히려 더 용수철처럼 튀어오른다. 반면 어떤 사람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퇴근하는 순간 꽤 잘 잊는다. 무엇이 다른 걸까.
▼ 몸보다 늦게 퇴근하는 마음
반복해서 생각을 곱씹어서 하는 이러한 반추는 단순히 ‘생각이 많다’는 것과 조금 다르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차분히 검토하고 내일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같은 장면이나 말, 감정을 반복해서 되씹으면서도 새로운 해결책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혹시 나를 안 좋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생각은 계속되지만 결론은 없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셈이다. 특히 책임감이 강하거나 자신의 수행을 꼼꼼히 점검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나타나기 쉽다. 업무량이 많거나 직장에서 갈등과 긴장이 지속될 때는 물론 더 심해질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이 있다. 바로 ‘심리적 분리(psychological detachment)’다. 쉽게 말하면 퇴근한 뒤 일에서 마음을 떼어놓는 능력이다. 컴퓨터를 껐다고 자동으로 심리적 분리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도 업무 메신저를 계속 확인하고, 내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고,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반복해서 복기한다면 몸만 집에 왔을 뿐 마음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있다.
▼왜 뇌는 끝난 일을 자꾸 다시 꺼내올까
그렇다고 이런 사람에게 “그냥 생각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애매하게 끝난 일, 실수했을 가능성이 있는 일, 앞으로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그냥 버려두는 데 능숙하지 않다. 특히 직장 일은 평가, 관계, 생계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상사의 애매한 표정 하나가 단순한 표정이 아니라 ‘확인해야 할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퇴근 후의 반추에는 묘한 역설이 있다.
내일을 잘 대비하기 위해 생각을 시작했는데, 그 생각 때문에 오늘 밤의 충분한 회복에 방해가 된다. 사람에게는 일을 열심히 하는 능력만큼 일에서 벗어나는 능력도 필요하다. 휴식 시간에도 계속 일을 생각하고 있다면 몸은 쉬어도 마음은 충분히 회복하기 어렵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머릿속에서 회의가 다시 시작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일을 잘 털어내는 사람은 무책임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잊어버리는 능력’보다 ‘언제 생각할지를 조절하는 능력’일 수 있다. 퇴근 후에도 계속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안 잊어버리려고 계속 애써요.”
그럴 때는 머릿속으로 기억하려 하지 말고 밖으로 꺼내 놓는 것이 도움이 된다. 퇴근하기 전에 내일 해야 할 일을 짧게 적어두는 것이다.
‘김 대리에게 자료 확인.’
‘10시 회의 전 보고서 수정.’
‘팀장님께 여쭤보고 확인 두 가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뇌에게 ‘이 문제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처리할 시간과 장소를 정해 두었다’는 신호가 된다. 우스갯소리 같이 우리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일의 나에게 부탁한다!’ 현명하게 적용하면 게으른 게 아니라 효율적인 것일 수 있다.
퇴근길에 작은 전환 의식을 만드는 것도 좋다. 회사에서는 신던 신발을 운동화로 갈아 신고 걷거나, 집에 도착하면 바로 샤워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가족과 저녁을 먹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활동 자체가 아니라 ‘업무 시간에서 내 생활로 넘어왔다는 경계’를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다. 다만 휴식을 또 하나의 부담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오늘은 반드시 5km를 뛰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퇴근 후에도 또 다른 일로 느껴질 수 있다.
동네를 걷거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거나 친구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상사의 말 한마디가 다시 떠오른다면 억지로 밀어내기보다 이렇게 구분해보는 것도 좋다.
▼ ‘이것은 지금 신경 써야 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내 머리 속 재방송인가.’
내일 확인하거나 행동할 일이 있다면 적어두면 된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 생각은 오늘 밤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다. 흘려보내고 싶다면 관찰하고 받아들여주고 지속 가능한 상태인지를 점검해줘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개인의 마음 관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퇴근 후에도 끊임없이 연락이 오고, 밤늦게 업무 지시가 내려오며, 실수에 대한 비난과 압박이 반복되는 환경이라면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조언만으로는 부족하다. 심리적 분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데에는 개인의 습관뿐 아니라 실제 일과 휴식의 경계가 존중되는 환경도 중요하다.
▼ 오늘의 일을 내일의 나에게 넘겨주기
우리는 흔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퇴근 후에도 일을 생각해야 할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하루 종일 긴장했던 마음이 다시 회복할 시간을 갖는 것 역시 다음 날 일을 잘하기 위한 과정이다. 유연하게 긴장과 이완을 전환할 수 있는 것이 결국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로 이어진다.

그래서 퇴근은 단순히 회사 문을 나서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 회의에서 조금 아쉬웠던 말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도, 내일 보내야 할 이메일도 잠시 내려놓는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은 메모해 둔 뒤 ‘이건 내일 회사에 있는 내가 처리할 일’이라고 넘겨주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밤늦도록 내일의 업무까지 미리 붙잡을 필요는 없다.
퇴근은 회사 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을 ‘내일 회사에 있는 나’에게 지혜롭게 넘겨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문> 김기원 가야삼성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의학박사, 전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교수, 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임의
<이미지 생성 = 챗 GPT>
한국경제TV 박준식 기자
parkjs@hankyungtv.com관련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