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직연금 계좌에서 투자할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ETF)가 1000개를 넘어섰지만, 직장인들의 노후자금 운용 고민은 여전하다. 반도체 등 인기 테마에 자금이 쏠리는 한편 시장 상황에 따라 매수 대상도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퇴직연금 가입자 절반 이상은 적립금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해, 늘어난 투자 선택지가 실제 운용 전략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모습이다.
24일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이 회사 퇴직연금 계좌에서 거래할 수 있는 ETF는 1030개로 집계됐다. 금융사마다 투자할 수 있는 상품 구분을 달리 하고 있지만, 사실상 한국거래소에 상장한 1175개의 ETF 대부분을 퇴직연금 계좌에서도 투자할 수 있다는 의미다.
퇴직연금 시장이 커지는 동시에 가입자들의 투자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501조 4000억원으로 전년보다 16.1% 늘었다.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도 24.6%로 3년 전의 두 배 수준까지 확대됐다.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던 자금이 투자상품으로 이동하면서 어떤 상품을 선택하고 어떻게 운용할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 반도체 떠나 인덱스로 대이동…시장 하락에 민감해진 투자자들
국내 ETF 시장이 커지고 있지만, 시점에 따라 특정 테마로의 쏠림이 뚜렸했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순매수 상위 1위부터 3위의 ETF는 모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담은 반도체 관련 상품이었다. 순매수 상위 10개 중 6개도 반도체 관련 ETF로 나타났다.
하지만 국내 증시가 급락한 7월에는 미국 S&P500과 나스닥100 등 대표 지수 추종형 ETF가 순매수 상위권에 올랐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의 TIGER 미국S&P500와 TIGER 미국나스닥100그리고 삼성자산운용의 KODEX 미국 나스닥100 1~3순위를 차지했다. 상반기 순매수 1위였던 KB자산운용의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은 상위 10위권 밖으로 밀어냈다. 시장의 관심이 반도체보다 상승률을 꾸준히 보여준 미국 대표지수로 옮겨간 셈이다.
KB자산운용의 RISE 삼성전자SK하이닉스채권혼합50 ETF는 주식과 채권을 결합해 퇴직연금 계좌에서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상품이다. 올해 2월 상장한 뒤 36영업일 만에 순자산 1조원을 넘어섰고, 4개월 만에 4조원을 돌파했다. 반도체 투자 수요에 퇴직연금의 안전자산 편입 수요까지 더해지며 자금이 몰렸다.
◆ '안 굴리기도, 잘 굴리기도 어렵다'…늘어난 선택지
가입자들의 고민은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진행한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보고서에 인용된 2025년 직장인 인식조사에서 퇴직연금 가입 직장인 1,003명 중 적립금 운용에 관심은 있지만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답한 비율은 57.1%에 달했다. 투자에 나서려 해도 수많은 상품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선택지를 찾기 어렵다는 의미다.
과거 퇴직연금 시장의 문제는 가입자의 무관심이었다. 디폴트옵션 도입 전에는 적립금의 약 90%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렀고, 2017~2021년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은 연 1.94%에 그쳤다. 이제는 투자 참여를 늘리는 것뿐 아니라, 가입자들이 수많은 상품 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관리할지 돕는 일이 중요해졌다.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수익률 상위 10% 가입자는 적립금의 84%를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해 19.5%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반면 적립금의 74%를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둔 하위 10% 가입자의 수익률은 0.5%에 그쳤다. 다만 이 결과만으로 투자 비중이 수익률 차이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정부는 통합연금포털의 자산 진단과 비교공시를 활용해 상품과 수수료를 비교하고, 직접 운용하기 어렵다면 타깃데이트펀드(TDF)나 디폴트옵션 등을 활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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