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십] '관선정' 세워 민족교육 실천한 남헌 선정훈

입력 2017-01-16 07:07   수정 2017-01-16 09:54

[나눔의 리더십] '관선정' 세워 민족교육 실천한 남헌 선정훈

"교육이 구국의 길"…집 옆 서당 지어 무료로 한학 가르쳐

(보은=연합뉴스) 박병기 기자 = 속리산 기슭인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134호인 '선병국 가옥'이 있다. 하천 사이 삼각주 모양의 널찍한 터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그 안에 4천 평 규모로 지은 134칸의 대저택이다.






이 집을 지은 이는 선병국의 부친인 남헌 선정훈(宣政薰·1888∼1963) 선생이다.

그는 전남 고흥에서 무역으로 큰돈을 번 부친 선영홍과 함께 1905년 이곳에 건너와 무려 16년에 걸쳐 집을 짓고,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서당을 세웠다.

서당은 무료로 운영됐다. 당대 명망 높은 스승을 모셔다 놓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학생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저택 일부는 이들을 위한 숙소 역할을 했다.

관선정에는 '착한 사람끼리 모여 좋은 본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저택 남쪽 300여m 지점에 자리 잡았는데, 1944년 일제 탄압으로 철거될 때까지 수백 명이 수학했다고 기록돼 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최장 10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공부한 사람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일본의 식민교육에 맞서 전통 한학을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이은 배움터로도 유명하다. 이곳 출신 학생 중에는 훗날 광복된 이후 구성된 정부에서 일한 사람도 수두룩하다. 유명한 한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임창순·변시연·나준 등도 이곳 출신이다.






남헌은 서울에 '대동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 여기서 나온 이익으로 서당을 운영했다. 학교와 면사무소를 지을 터를 내놓고 낡은 보은향교 중수에도 참여하는 등 언제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다.

이 집안 종부(宗婦)로 지금도 저택을 지키고 있는 김정옥(64) 여사는 "시어른들이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지은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며 "집이 완공된 뒤에도 150명이나 되는 식솔을 건사하면서 나눔을 실천하셨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충청도의 이름난 부잣집으로 알았는데, 막상 시집와보니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살림살이가 어려웠다"며 "시어른께서 이웃과 나누시느라 정작 내 집 살림이 기운 것도 모르셨던 것"이라고 과거를 회고했다.

남헌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선정훈 송덕비(頌德碑)와 관선정 기적비(紀蹟碑)를 세워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저택 대문 앞 송림 숲에 세워진 송덕비에는 "오직 교육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결심해 관선정을 세우고 보은향교에서 대향회를 열어 훈학했다"고 남헌의 공적을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은 선생의 기일이면 이 집에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김 여사는 "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수십 명이 찾아와 며칠씩 머물면서 제를 올렸다"며 "제사 음식 준비에 3∼4일씩 걸렸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 집안은 조상 때부터 나눔을 미덕으로 삼았다.

남헌의 부친은 소작농에게 논밭을 무료로 나눠주고, 일정 기간 세금까지 대납하면서 가난 극복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혜택을 본 소작농들은 1922년 전남 고흥에 은혜에 감사하는 시혜비(施惠碑)를 세웠는데, 이 비는 2004년 충북 보은으로 옮겨져 아들 송덕비 옆에 나란히 서 있다.






민족정신도 남다르다.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고, 식민지 교육을 거부한 채 전통 유학교육도 고집했다.

차종손인 종완(34)씨는 "워낙 유교사상이 투철한 집안이어서 신식교육이 시작된 뒤에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한학을 가르쳤다"며 "아버지께서도 열두 살이 돼서야 학교 문턱을 처음 넘으셨다"고 전했다.

남헌은 1926년 순종의 국상 때 큰돈을 내 능침(陵寢) 조성을 도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 일로 '비서승(秘書丞)'이라는 벼슬이 내려졌으나 국치의 관직이라고 거절할 정도로 성품 곧은 소신파였다.

보은군 문화 해설사이자 남헌을 연구 중인 향토학자 박진수(51)씨는 "일본이 한반도를 수탈할 때도 남헌은 일본 정부에 돈 한 푼 보탠 흔적이 없다"며 "당대 손꼽히는 부자가 친일을 거부하고 민족정신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남헌과 그의 부친이 수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굳이 지금의 집터로 잡은 점도 연구해야 한다"며 "이곳이 1893년 동학군의 집회지였고, 그 뒤 일제에 의해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진 점에 비춰볼 때 항일의 의지를 담은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bgipar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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