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백제 흥망 지켜본 부소산성

입력 2017-02-14 08:01  

[연합이매진] 백제 흥망 지켜본 부소산성

(부여=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백제는 나라를 세운 뒤 세 차례 도읍을 세웠다. 처음에는 한강 유역의 한성에 자리를 잡았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위례성 침범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공주의 옛 지명인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고, 서기 538년 웅진 시대를 마감하고 사비(부여)로 천도한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는 성왕이 백제의 중흥을 꿈꾸며 세웠다. 농경에 유리하고 외침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신도시로 설계됐다. 공주에서 35㎞ 남서쪽에 있는 부여는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뜻으로 서기 660년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멸망의 처절한 아픔을 맞았던 고도이기도 하다.

성왕은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립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나성(羅城)을 축조한 다음 천도를 단행했다. 이와 함께 16관등제와 2부제, 불교 교단의 정비 등 여러 방면의 체제정비를 단행해 지배체제 질서를 확립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왕궁 뒤쪽에 있는 부소산은 평소 왕과 태자들이 즐겨 찾는 후원이었다. 부소산성은 유사시에 피신처이자 왕성을 지키는 보루가 됐다.





부소산성은 산봉우리를 머리띠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골짜기를 이용해 성을 만드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성벽 축조 방법은 점질토와 마사토를 번갈아 가며 일정한 두께로 다져 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됐다. 성곽의 총 길이는 2.2㎞ 정도다. 고대 중국, 일본과의 교역로 역할을 했던 백마강이 바로 옆으로 흐르고,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나성과 동서 방향으로 연결돼 있다.

나정하 문화관광해설사는 “사비는 웅진과 달리 넓은 평야 지대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 풍족할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일본과의 교역로 역할을 했던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다”면서 “부소산성을 정점으로 해서 세계문화유산인 나성이 동서 방향으로 연결돼 있고, 더 바깥쪽으로는 석성산성과 성흥산성이 왕궁을 에워싸 방어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고 말한다.





◇ 부소산성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


백마강을 끼고 있는 부소산(扶蘇山)에는 백제의 대표 세계문화유산인 부소산성과 관북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해발 106m의 나지막한 구릉인 부소산의 정상부에 쌓은 부소산성에는 삼충사, 군창지, 서복사터, 낙화암 등 백제의 마지막 숨결이 곳곳에 스며있고, 걷기 좋은 숲길이 문화재와 유적을 연결해 준다.

부소산성 출발점인 부소산문 매표소를 지나 널찍한 돌이 깔린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길이 양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 숲길로 접어들면 몇 걸음 안 가 백제의 세 충신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삼충사’(三忠祠)를 만난다. 사당에는 백제 말엽 임금에게 직언해서 고초를 겪은 충신 성충과 흥수, 5천 명의 결사대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계백 장군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성충은 좌평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충언을 하며 옥에 갇힌 뒤 단식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성충과 함께 충언하다 유배를 간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탄현을 지키라는 간언을 했던 인물이다. 오늘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신은 어디에 있는가? 삼충사 경내를 맴도는 바람이 매섭다.




삼충사를 지나자 길옆으로 진흙과 마사토를 층층이 쌓아 만든 토성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백마강 쪽으로 가는 포곡식 산성과 군창지 뒤편으로 가는 테뫼식 산성을 두루 볼 수 있다. 토성의 단면을 잘라보면 맨 아래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했는데 바깥쪽에는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맨 위층에서는 조선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백제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축과 개축을 거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돌을 쌓아올린 조선 시대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과는 달리 성벽이라는 느낌이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1천500여 년 세월의 비바람을 견디어 오늘까지 토성 흔적이 뚜렷한 것을 보면 당시 축성 기술을 짐작할 만하다.

토성을 밟고 걷다 보면 부소산의 동쪽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층 누각 건물인 영일루가 나온다. 원래 이곳은 왕과 귀족이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나랏일을 구상했다는 영일대 터로 전해진다. 1964년 조선 시대 홍산현에 있던 관아의 정문 ‘집홍루’를 이곳에 옮겨놓고‘영일루’라는 현판을 걸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영일루를 지나 몇 걸음 안 가 널찍한 평지의 군창지에 이른다. 1915년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면서 백제 시대 군량미 등을 보관하던 창고 터로 알려지게 됐다. 지금은 건물의 초석들만 남아 있는데, ‘ㅁ’ 자 형식의 건물 기단부가 확인됐다. 동쪽건물은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로 각 칸의 중앙에 문을 설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금 더 가면 수혈(구덩이) 주거지다. 1983∼1984년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3개의 수혈 건물지, 목책구멍, 저장구멍 등이 발견됐다. 제3 건물지는 규모가 가로, 세로 약 4m의 정사각형으로 난방과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불을 피웠던 노지를 설치한 흔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금동봉황장식, 연꽃무늬수막새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됐다. 군창지와 가깝고 토성에 둘러싸인 점으로 미루어 군사들이 상주하던 군사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혈주거지를 지나 느릿느릿 걷다 반월루(半月樓)에 올라본다. 현판은 사비성이 둥글게 휘어진 반달 모양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1972년 세운 이층 누각으로 건물의 내력은 내세울 것 없으나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신도시답게 사방으로 펼쳐진 도로가 반듯반듯하게 연결된 부여읍내와 정림사지, 반월형으로 읍내를 감싸고 도는 백마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부여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크게 휘돌아 흐르는 백마강은 옛 문헌에 사비강, 사자강, 백강, 백촌강 등으로 기록된 강으로 오늘의 금강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부소산 건너 동편 정동리 범바위와 천정대에서 남쪽 세도면 반조원리에 이르는 약 16㎞ 구간의 금강이 곧 ‘백마강’이다.

반월루에서 내려와 낙화암 가는 길목인 광장 사거리를 지나 언덕으로 향하면 부소산 북쪽 끝 정상이다. 원래 달맞이하던 송월대(送月臺) 터인데 1919년 임천군 관아의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옮겨온 후 ‘사자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면에 걸린 사자루 현판은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글씨이고, 백마강 쪽으로 걸린 현판 ‘백마장강’(白馬長江)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이다. 누각을 세우려 땅을 고를 당시 ‘정지원이 새겨진 금동삼존불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됐다. 백제 귀족 정씨가 죽은 아내의 내세를 기원하며 만든 금동삼존불입상은 불상과 좌우의 보살상이 하나의 광배와 함께 주조된 일광삼존(一光三尊) 형식의 불상이다.







◇“적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사자루 바로 아래쪽에는 높이 40m 절벽인 낙화암(落花巖)이 자리를 잡고 있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의자왕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삼천궁녀가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은 어디서부터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백제의 궁녀가 삼천 명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나정하 문화관광해설사는 “의자왕이 삼천궁녀와 놀아난 방탕한 왕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며 “삼국사기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그때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고 일컬었다’라고 기록돼 있다”고 말한다. 낙화암이라는 이름도 궁녀의 죽음을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 후대의 표현이 굳어진 것으로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 곧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로 기록돼 있다.

낙화암 앞에 서니 백제 이전부터 지금까지 쉼 없이 흐르고 있는 백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무리 둘러봐도 삼천궁녀가 뛰어내릴 만한 곳이 못 된다. 백제가 멸망하는 순간, 적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궁녀의 비장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한편으로는 백마강과 이를 거슬러 오르는 유람선이 어우러진 풍경이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조선 숙종 때 석벽 홍춘경은 이곳에 와서 한시 ‘부소낙화암’을 읊었다.

낙화암 정상에는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1929년 세운 백화정(百花亭)이 있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해주에 귀양 가 있을 때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百花州)라는 시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화정에서 가파른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 고란사다.







백마강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보전에는 본존 부처님인 아미타여래,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있다. 특히 관음보살은 백의불상(白衣佛像)이다. 백의보살은 자기 몸을 태워서 일반인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한다. 극락보전 벽에 그린 불화 심우도(尋牛圖)도 아름답다.

마곡사의 말사인 고란사 뒤 바위 틈에 ‘고란정’이라는 샘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자란다. 한 잔 마시면 삼 년이 젊어진다는 고란약수를 백제의 왕들이 마셨는데 마침 약수터 주변에만 자생하는 기이한 풀이 있어 잎 하나를 물동이에 띄워 그곳 약수라는 걸 확인했다고 한다. 이 풀이 강가 절벽이나 산지 계곡 등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바위의 좁은 틈에만 자라는 고란초다. 우물을 덮은 지붕을 설치한 후 고란초가 전멸했다고 한다.

고란사에서 강가로 더 내려가면 구드레나루터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이다. 유람선을 타고 잔잔한 물살에 흔들리며 낙화암과 백화정 풍경을 음미하는 맛도 색다르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낙화암’(落花巖)이란 붉은 글씨를 제대로 볼 수 있다.

백화정에서 왔던 길을 되짚어 광장 사거리로 나왔다. 오른쪽은 서복사터를 거쳐 부소산 서문과 부소산문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왼쪽은 태자골 숲길이다. 백제 태자들이 자주 산책하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이 이 숲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태자에게 억울한 일을 고했던 길로, 태자들은 성군이 되리라 결심하며 이 숲길을 걸었을 것이다. 낙화암에서 생을 마감한 궁녀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인 궁녀사, 산책하던 태자들이 마셨다는 태자천을 지나 영일루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산책 삼아 걷는 길이다. 영일루에서 부소산문으로 내려오면 부소산성 답사는 마무리된다.







부소산문 바로 옆,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는 백제 왕궁터인 관북리 유적이 있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너비가 35m가 넘는 대형 전각건물터와 동서남북으로 구획된 도로, 왕실수공업 공방과 저장시설, 연못과 정원, 수부(首府) 명문자기와, 금동제 허리띠 등 왕궁 관련 시설과 유물들이 발견됐다. 왕궁 건물로 보이는 대형 건물터와 목곽 창고 등을 발굴해 일부를 복원해 놓았다. 이곳에서 나온 목간, 금제귀걸이장식, 토기, 기와류 등 은 인근 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2월호 [문화유산]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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