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순·문혜진…1990년대 관습 뛰어넘은 시인들의 귀환

입력 2017-01-30 18:10  

박상순·문혜진…1990년대 관습 뛰어넘은 시인들의 귀환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혜성의 냄새'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1990년대 등단해 도발적이고 전위적인 시세계로 한국 시단의 보폭을 넓힌 박상순(55)·문혜진(41) 시인이 오랜 공백을 깨고 나란히 새 시집을 엮었다.

박상순 시인이 '러브 아다지오'(2004) 이후 13년 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난다)에는 해석과 의미화를 거부하는 52편의 시가 3부로 나뉘어 실렸다. 시인은 현실세계의 단면이나 인간의 감정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대신, 오로지 언어로써 쌓아올린 하나의 세계를 감각하라고 권유한다.

"우주인만 남았다. 1시 07분/ 6월의 우주인만 남았다. 1시 08분/ 출렁이는 물병을 든 우주인만 남았다. 1시 09분/ 가슴속에도, 출렁이는 물병을 넣은/ 우주인만 남았다. 1시10분" ('6월의 우주에는 별 향기 떠다니고' 부분)

'목화밭 지나서 소년은 가고'처럼 제목만으론 일견 서정적으로 보이는 작품도 있지만, 전통적 의미의 서정시는 찾아볼 수 없다. 시인이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북 디자이너로 일했다고 해서 선명한 이미지를 눈앞에 제시할 거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진짜. 온종일. 슈슈슈. 시인 언니 오늘 또 병신 돋는다."('오늘, 시인 언니 병신 돋는다') "지랄, 지랄, 지랄, 지랄,/ 핀란드 도서관의 문짝 갈라지는 소리."('핀란드 도서관') 비속어를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고 일명 '음슴체'에도 시어의 자격을 부여하며 시라는 형식과 주체의 자의식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한다.

"잘못 알았음/ 그곳은 병실인데 또 잘못 알았음. 아뿔싸./ 겨울이 왔음/ 창밖엔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는데, 누가 있겠음?" ('내 봄날은 고독하겠음' 부분)

시인은 1991년 등단 이후 줄곧 낯설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써왔다. 난해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시들로 2000년대 중반 평단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던 소위 '미래파'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시인은 시집 맨 뒤에 "세상은 지각이나 감각 또는 인지의 결과와는 다른 것일 수 있고, 나는 그 한계 안에 있다. 허구처럼 보이는 사건들과 이미지로서의 환영을 교차하면서, 미미한 나의, 문제와, 절박하게, 침통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대면하고자 했지만, 더 즉물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어떠한 의미도 배제해야 한다"고 썼다.




박상순 시인이 20년 넘도록 변함없는 작품세계를 펼치고 있다면 문혜진 시인의 새 시집에선 적잖은 변화가 눈에 들어온다. 1998년 등단한 시인은 20대 후반에 낸 첫 시집 '질 나쁜 연애'(2004)에서 강렬한 언어로 여성의 몸과 성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를 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라고 도발하며 '한국 시의 록 스피릿'이라는 별명을 얻은 시인이다.

'검은 표범 여인'(2007) 이후 10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 '혜성의 냄새'(민음사)를 보면 시인의 사유는 좀더 폭이 넓어졌다. 표제작에서는 포름알데히드·메탄·암모니아 등 혜성의 구성성분을 분석하고 냄새를 상상해본다. 그렇게 본질을 묻는 혜성은 인간과 우주를 잇는 매개다.

"암모니아// 그날 밤,/ 그 냄새는/ 내 몸 속 어두운 구석에서 시작되었다/ 고름 고인 이빨 사이/ 가랑이 사이/ 땀구멍/ 털 속/ 림프관에서 시작되었다/ (…)/ 아파트 15층 옥상,/ 벽돌 수직 낙하/ 퍽!/ 피투성이 얼굴/ 그 위로 훅 끼쳐오는/ 불타는 혜성의 냄새" ('혜성의 냄새' 부분)

"플라스틱 물통에 담아 온 직지사 버들치/ 버들치가 죽었다/ 엄마, 물고기가 나무가 되었어요!/ 나는 창밖에 서 있는 버드나무들을 바라본다" ('KTX에서' 전문)

'화석이 된 이름 트리옵스'에서 시인은 아이가 생일선물로 받아온 애완용 새우를 함께 부화시켜 기르며 '살아있음'이라는 상태에 경탄한다. 시선이 부드럽고 풍부해진 데는 나이를 먹어가며 삶의 조건이 바뀐 탓도 있을 테다. 시인은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편의 동시집을 내며 아동문학에도 발을 담갔다.

그러나 시인은 아이와 함께 둘러본 파충류 전시관에서조차 독사의 뱃속으로 들어가 내장을 할퀴는 상상을 하며('검은 맘바') 불온한 야생성을 벼리고 있다. "아직도 나는 하고 싶어. 결석과 암석의 돌팔매질, 당신들의 흘러넘치는 속물과 겉물의 아밀라아제" ('인왕산에서' 부분)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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