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대중가요 스타, 평양기생 왕수복

입력 2017-04-13 07:31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대중가요 스타, 평양기생 왕수복

(서울=연합뉴스) "조선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환기하기 위하야 경성방송국에서는 일본방송협회와 협의한 결과 오는 1월8일에 조선아악, '아리랑' 등과 같은 조선 색채가 가장 농후한 노래의 순서를 작성하야 일본 전국에 중계방송을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그 후부터는 1개월에 1회씩 전 일본에 중계방송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1월9일에 중계방송할 순서는 금정전 정무총감의 인사를 비롯하야 이왕직아악부의 조천아악과 왕수복 양의 유행가 등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3. 12. 23. '조선악방송 각지에 중계')

일제 강점기 유일한 라디오 방송이었던 경성방송국은 1934년 1월8일부터 정기적으로 일본에 한국어 제2방송을 중계했다. 아악연주를 비롯해 조선의 지리, 민속을 소개하는 강연, 실황방송, 민요와 유행가, 어린이들의 창가 등이 전파를 탔다.

특히 1934년 1월9일에는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연주와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 출신 17세 왕수복이 경성방송국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 부른 민요 '아리랑'이 일본 전역에 중계됐다. 이날 왕수복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 외에도 당시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 '고도의 정한', '눈의 사막' 등이었다.


경성방송국이 내세운 최고의 인기가수 왕수복은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4월23일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왕성실이었다. 명륜여자공립보통학교에서 처음 노래를 배웠고 12세가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가사와 시조, 가야금, 장고, 춤, 그림 등을 배우고 1931년에 졸업, 정식 기생이 됐다.

왕수복은 건장한 체격에 목소리가 우렁차고 기운이 좋았다고 한다. 가창력이 뛰어나 1933년부터 직업적인 가수 생활을 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와 '패성의 가을', '신방아타령', '한탄' 등을 취입,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가 됐다. 이듬해 데뷔한 역시 평양기생 출신 선우일선과 기생 출신 대중가요 가수로 쌍벽을 이루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창작 유행가가 등장하고 민요를 서양식 음보에 맞춰 대중화한 신민요가 탄생한다. 신민요는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중간 역할을 했다. 당시 유행가, 신민요 등이 현재의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한다.

왕수복은 1933년 폴리돌 레코드사로 소속을 바꾸면서 '유행가의 여왕'으로 자리를 잡았다. 폴리돌 레코드에서 취입한 '고도의 정한'은 조선 유행가 중 가장 인기를 끌어 120만장이 팔렸다. 당시 최고의 음반 판매량이었다. 이후 폴리돌 레코드와 콜럼비아 레코드를 오가며 많은 노래를 취입했다. '낙엽', '망향곡', '생의 한', '그 여자의 일생', '그리운 고향' 등의 유행가와 신민요 '그리워라 그 옛날이', '마즈막 아리랑', '조선타령', '최신 아리랑' 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당시 레코드 가수들은 대부분이 기성권번의 기생 출신이었다. 이를 시작한 사람이 바로 왕수복이다. 레코드를 가장 많이 구매한 층도 기생이었다. 왕수복은 1935년 잡지 '삼천리'가 실시한 전조선 남녀가수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인기 절정에 있던 1936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 음악학교의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서 3년간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을 공부했다. 이후 메조소프라노 가수로 변신하여 주로 조선 민요를 서양 성악 창법으로 불렀다.

왕수복은 당시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최승희씨가 조선무용을 살린 것처럼 나는 조선의 민요를 많이 노래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오사카 아사히 남선판 1939. 4. 9.)

이후 그는 1942년까지 폴리돌 레코드의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뻐꾹새', '울산타령', '봄맞이 아리랑', '조선타령', '능수버들', '노들강변' 등 수많은 신민요를 취입했다. 또한 '청춘을 찾아서', '조선의 달', '인생의 봄' 등의 유행가로 인기를 누렸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일제는 '성전완수'를 위한 총동원령을 내리게 된다. 당시 유행가 가수들에게 '내선일체'를 고취하는 노래나 침략적 성격의 군가들만 일본어로 부르도록 강요했다. 조선 민요도 예외 없이 일본어로 부르도록 압박했다. 이렇게 되자 왕수복은 1942년 한창나이인 25세에 가수 생활을 접는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조선 청중 앞에서 일본어로 조선 민요를 부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변절이고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치욕의 시대였다. 가요계는 1942년 조선군 보도부에 차출돼 전쟁에 협력하게 된다. 가수들은 징용 나간 사람들, 학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에 동원됐고 이른바 총력전 수행을 목표로 전쟁 분위기를 고취하기 위해 군가를 불러야 했다.


왕수복은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가 이효석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하다. 1940년 1월 상처한 이효석은 상실감에 빠져 건강을 해친 상태에서 그해 10월 왕수복의 언니가 운영하던 평양 시내 방가로 다방에서 왕수복을 만났다. 왕수복은 책 읽기에 욕심이 많아 당대 뛰어난 문학작품을 섭렵할 정도였다고 한다. 평소 이효석의 소설에 매료돼 있던 왕수복은 이효석과 바로 연인 사이가 됐다. 이효석은 1942년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그해 5월25일 36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효석의 아버지와 왕수복이 임종을 지켰다.

이후 왕수복은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었던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수 출신 김광진과 1945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분단과 함께 평양에 정착했다. 후에 김광진은 김일성대학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왕수복은 1945년부터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민요강사를 거쳐 1953년에 북한 중앙라디오 방송위원회 전속가수로 가수 활동을 재개했다. 1955년에는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가 되어 '신아리랑', '능수버들'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1959년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을 지내는 등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활동했다. 김일성 부자의 총애 속에 말년에 윤이상음악연구소의 명예 가수가 됐고, 1997년 팔순에는 왕수복 민요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2003년 6월1일 86세로 숨져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65년 5월10일 김광진과 함께 판문점을 관광하는 모습이 한국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한국 언론에 "8.15전 서울에서 가수 노릇을 했고 지금도 방송 등에 출연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이 자기와 같은 또래인데 "작고했다니 참 안되었다"라고 말했다.


일제 강점기는 한국 근대음악의 발전 과정에서 새로운 음악문화를 등장시킨 전환기였다. 급격한 사회 변동에 따라 나타난 새 음악문화가 그 시대를 앞 시대와 구분짓도록 만들었다.

북으로 간 가수 왕수복. 그는 오랜 기간 잊혀진 존재였다. 원래 북한 출신이었고 사회주의 경제학자였던 남편이 월북하자 북한에 정착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는 북한에서 북한 정권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렇다고 해도 분단 이전 대중문화 초창기 그가 한국 근대음악사에 끼친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1930년대 후반 비권번 출신 신진 남녀가수들의 등장 이전까지 창작 유행가와 신민요 가수로 활약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우리 대중가요사의 전환기에 나름의 필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근대음악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대중가수로 기억할 만하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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