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시간의 다리' 건너온 왕인 박사

입력 2017-05-06 08:01  

[연합이매진] '시간의 다리' 건너온 왕인 박사

영암 왕인문화축제, 천지인(天地人) 대동 한마당

(영암=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왕인(王仁) 박사가 돌아왔다. 1천600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훌쩍 건너서다. 천지사방에는 새하얀 벚꽃이 만발했다. 개나리꽃, 목련꽃, 진달래꽃도 나란히 피어 봄을 합창했다. 보름이 가까워서인가. 웅장한 월출산(月出山) 천황봉 능선에선 휘영청 밝은 달이 탐스럽게 떠올랐다. 먼먼 옛날,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보았을 바로 그달! 왕인문화축제는 나흘 동안 월출산 기슭에서 감동과 교훈을 듬뿍 안겨주며 흥겹게 펼쳐졌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과 놀이! 역사축제 특유의 즐거움을 대자연의 향연과 함께 만끽할 수 있는 천지인(天地人)의 대동 한마당이었다.





◇ 최대 하이라이트 '왕인 박사 일본 가오!' 퍼레이드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 달이 뜬다!"

왕인문화축제의 최대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왕인 박사 일본 가오!' 퍼레이드가 펼쳐진 4월 9일 오후 전남 영암군 군서면 왕인박사유적지의 주 무대. 이곳에서는 커다란 북소리 음향과 함께 왕인 박사의 환송의식이 뮤지컬 공연을 통해 장엄하게 재현됐다.

"영암의 호흡이여! 백제의 숨결이여! 커다란 바람 되어 섬나라 일본에 전해다오!"

퍼레이드 출발 선언과 함께 깃발을 앞세운 왕인 박사 가장행렬은 신명 난 북소리에 맞춰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찬 리듬의 타악기 악단과 우아한 차림의 백제 전통무용단이 앞장선 가운데 왕인 박사 부부와 사신들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들과 함께 그 뒤를 따르며 역사적인 일본행 장도에 올랐다.

길 양옆에 늘어선 영암의 11개 읍면 주민들은 아득한 과거의 백제 백성이 되어 요란한 풍물과 환호로 왕인 박사를 환송했다. 퍼레이드가 펼쳐진 왕인박사유적지와 구림마을 일원은 순식간에 거대한 행위 예술의 무대로 바뀌었다. 주민과 방문객 등 모든 참가자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 없이 한 덩어리의 주인공으로 연출한 축제판이었다. 수천 명이 동행한 왕인 박사 퍼레이드는 영월관과 구림마을을 통과한 뒤 영암도기박물관 앞을 지나 상대포 역사공원까지 약 2km 구간에서 한 시간여 동안 장대하게 진행됐다.

드디어 일본행 황포돛배가 기다리고 있는 상대포(上臺浦). 환송 오페라와 무용이 펼쳐지는 가운데 목선 왕인호에 오른 왕인 박사 일행이 천천히 손을 흔들며 환송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보내자 새하얀 꽃들은 축복의 꽃눈인양 건듯 부는 봄바람에 마구 흩날렸다. 하늘에선 100여 개의 꼬리연들이 줄줄이 날아올라 송별과 소망의 손짓을 보내는 듯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감동의 환상미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왕인박사유적지 한쪽에 서 있는 시비의 문구가 퍼뜩 겹쳐 떠올랐다. 와타나베 게이라는 일본인이 지었다는 노랫말이다.

"월출산에 봄이 오네/ 저 멀리 들녘에는 꽃이 만발해/ 성기동 골짝마다 울리는 북소리/ 춤추는 아가씨들 옷매도 고와/ 달님도 미소 짓는 아- 왕인축제"

포구를 쩌렁쩌렁 울린 남성 3중창 공연 또한 일행의 출항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곡명은 현제명 작곡의 '희망의 나라로'.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 경계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 32살에 일본 건너가 아스카 문화 원조로



해마다 4월이면 영암군 군서면 일대에서는 1억3천만 일본인들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왕인 박사를 추앙하는 대규모 축제가 열린다. 왕인박사유적지와 상대포역사공원, 도기박물관 등 구림마을 일대는 왕인 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에 태어나고 자라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월출산 주변에 벚꽃들이 꽃망울을 펑펑 터뜨리는 시기에 개최돼 이맘때면 상춘객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몰려들곤 한다.

20회째를 맞은 올해 왕인문화축제는 4월 6일부터 9일까지 나흘간 '왕인의 빛! 소통ㆍ상생의 길을 열다'라는 주제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다. 축제 기간에 다녀간 방문객은 무려 80만 명(주최 측 집계). 이번 축제에서는 대표 프로그램인 '왕인 박사 일본 가오!' 퍼레이드를 비롯해 6개 부문의 84개 프로그램이 줄줄이 이어져 방문객들에게 만족감을 듬뿍 안겨줬다. 왕인 박사가 과연 누구이기에 천 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후손의 뜨거운 추앙을 받는 걸까?

일본 아스카(飛鳥) 문화의 시조인 왕인 박사는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서기 375~384년) 때 지금의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달리 총명해 여덟 살 때 월출산 주지봉 아래에 있는 문산재(文山齋)에 입문해 유학과 경전을 공부한다. 문산재는 책굴(冊窟), 양사재(養士齋)와 더불어 왕인이 학문을 갈고닦았던 수학과 담론의 현장이었다. 문장이 워낙 뛰어나 열여덟 살 때 오경박사(五經博士)로 등용된 그는 백제 17대 아신왕 집권기에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고 일본으로 향한다. 그 출발지가 바로 국제무역항이었던 상대포다.

당시 32살의 젊은 나이였던 왕인 박사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들고 도공, 야공, 와공 등 기술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 문화의 원조로 등극한다. 일본 역사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시원이 된 것이다. 그의 묘지는 현재 일본 오사카 부의 히라카타 시에 있으며 1938년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됐다.

축제는 첫날 오전 왕인사당에서 왕인박사 춘향제를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프로그램들이 동시다발로 숨 가쁘게 이어졌다. 눈길을 끈 프로그램 중 하나는 8일 오후와 9일 오전 진행된 '왕인의 길! 체험'. 관광해설사의 안내로 주 무대 앞을 출발한 대규모 체험단은 영월관, 왕인가묘, 월악루, 성천, 왕인박사 탄생지, 왕인사당, 왕인학당 코스를 천천히 거닐며 왕인 박사와 학문, 나아가 박사가 추구했던 소통과 상생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체험단의 발길을 머물게 한 곳 중 하나는 왕인 박사가 태어났다는 '성기골'의 '성천(聖泉)'. 주지봉 아래 성기동(聖基洞)의 박사 생가터에서 100m가량 산 쪽으로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조그만 샘이다. 왕인 박사의 모친이 이 물을 마시고 아들을 잉태하고, 세상에 태어난 왕인 박사도 이 물을 마시며 기운생동했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체험 참가자들은 샘물 덕분에 박사의 원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체험단에 참여한 김혜빈(19ㆍ영암여고 3년) 양은 "그동안 이곳을 몇 차례 와봤지만 이렇게 깊은 내력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며 "정말로 신선한 기운을 얻은 듯하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온 임경석(27ㆍ조선대 4학년) 씨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축제에 참가했는데 설명을 직접 듣고 나니 왕인 박사의 발자취와 업적이 깊게 와 닿는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광자 해설사는 "음력 3월 삼짇날에 이 샘의 물을 마시고 바로 옆의 계류에서 목욕하면 왕인 박사와 같은 성인을 낳는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져온다"며 체험단 일행과 한목소리로 "오늘은 내가 왕인 박사다! 화이팅!"을 힘차게 외쳤다.



◇ '도포제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 흥겹게 재현



올해로 3년 연속 정부의 문화관광축제 중 유망축제로 선정된 왕인문화축제는 단순한 역사축제에 머물지 않고 향토의 풍속과 예술을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도입해 방문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4월 7일 오후 실연된 갈곡들소리와 삼호강강술래, 8일 오후 진행된 영암민속씨름, 9일 오전 펼쳐진 도포제(都浦祭) 줄다리기가 그런 사례였다. 이들 전통 프로그램은 윤도현밴드 빅콘서트, 김현철의 유쾌한 오케스트라, 왕인 청소년 페스티벌 등 현대 공연들과 함께 축제의 다양성을 한껏 살렸다.

4월 9일 오전 기다란 행렬에 이어 주무대광장에서 떠들썩하게 진행된 도포제 줄다리기 현장으로 다시 가보자.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풍년 들고!"

"상~사 디여 디여! 얼~럴러 상사 디여!"

"하늘에는 별도 총총! 꽃밭에는 꽃도 총총!"

"상~사 디여 디여! 얼~럴러 상사 디여!"

박판남 도포제줄다리기 민속보존회 회장이 선소리를 외쳐대자 수줄과 암줄을 들쳐매거나 따르는 줄꾼들이 역시 힘차게 뒷소리로 화답했다. 도포제 줄다리기는 이곳 도포마을에서 계승돼 오는 전통의 줄당기기 놀이. 동도포와 서도포가 각기 수줄과 암줄을 붙잡고 승패를 겨룬다. 이날 줄다리기는 양쪽 마을에서 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관광객들과 더불어 신명의 놀이마당을 연출했다.

마을주민 이송재(72) 씨는 "도포제 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에 해왔는데 수줄이 이기면 풍년이, 암줄이 이기면 흉년이 든다는 속설이 전해진다"며 "동서로 편이 갈리면 줄다리기하는 날까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지만 줄다리기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모두가 다시 하나가 돼 기쁨을 나눈다"고 말했다.

축제란 이처럼 소통과 공존, 해원과 상생의 힘을 속성상 갖고 있는 것이다. 도포제 줄다리기는 가정의 평안과 농사의 풍년,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한다. 북소리로 놀이판을 요란하게 울려대는 영암낭주농협풍물단의 이경자(50) 씨는 "시집 와서 20년 동안 북을 치고 있당께. 축제에 오면 모두가 이라고(이렇게) 기분 좋아! 신난다고!" 하며 소탈한 웃음과 함께 겅중겅중 춤을 췄다.







◇ 올해로 20회째…역대 최다 방문객



올해 왕인문화축제는 80만 명이라는 역대 최다 방문객 수가 말해주듯이 전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비 온 뒤의 맑고 따뜻한 봄날씨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벚꽃 만개 덕분에 남도 벚꽃의 환상로드로 불리는 '군서 100리 벚꽃길'은 축제장과 함께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 특히 개막행사에는 이집트, 브라질, 스위스, 루마니아 등 15개국의 주한 외교사절단과 일본 히라카타시, 간자키시, 일한친선협회, 왕인총 환경수호회 대표 등이 참석해 눈길을 모았다.

전동평 영암군수는 "지역특색을 살리는 명품축제이자 축제기간에 단 한건의 사건사고도 없는 안전축제,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경제축제로 거듭났다"면서 "왕인박사의 소통과 상생의 정신이 빛나는 글로벌 축제로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김한남 영암군향토축제추진위원장도 "올해는 체험과 공연 프로그램을 전체 프로그램의 70%에 가깝게 대폭 늘려 가족이 함께하는 축제가 되도록 했다"며 "날씨와 벚꽃개화시기 역시 금상첨화의 '맞춤'이었다"고 흡족해했다.

한편 이번 왕인축제 기간에는 한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제6회 대한민국한옥건축박람회가 축제장 바로 앞인 영암목재문화체험장에서 개최돼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안겨줬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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