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존재를 사과하지 않겠다" 차별철폐 이끈 게이 헌법재판관

입력 2017-05-25 13:45  

"나의 존재를 사과하지 않겠다" 차별철폐 이끈 게이 헌법재판관

에드윈 캐머런 신간 '헌법의 약속' 출간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성 소수자(LGBTI·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인터섹스)에 대한 차별 금지를 헌법에 처음 명문화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1997년 선포된 남아공 헌법의 평등권 조항에는 인종, 젠더, 성, 임신, 혼인, 민족, 사회적 출신, 피부색, 연령, 장애, 종교, 양심, 신념, 문화, 언어, 태생 그리고 성적 지향을 이유로 누구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얼마 전까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란 극심한 인종차별 정책으로 악명을 떨치던 나라가 모든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 철폐의 선도국으로 변신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차별 철폐에 이처럼 철저하고 치열한 것은 차별로 인한 상처가 그만큼 깊고 컸음을 의미한다.

신간 '헌법의 약속'(원제 Justice)은 가난과 질병에 찌든 인권 불모의 땅 남아공에서 지구 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탄생시키는 지난한 여정을 한 인물의 극적인 인생사를 통해 펼쳐 보인다.

저자이자 이야기의 주인공인 에드윈 캐머런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하에서 인종차별 철폐와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인권변호사로, 그 자신이 게이라는 것과 에이즈의 원인인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자라는 사실을 공개한 소수자다.

그는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의해 요하네스버그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됐으며 대법원 판사를 거쳐 2008년부터 지금까지 남아공 최고법원인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재직 중이다.

캐머런은 1953년 남아공 프리토리아의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둔 가난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동차 절도범으로 징역살이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법의 실체를 알게 됐고,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는 용감한 판사들을 보고 자라면서 법조인으로 길을 가게 됐다고 한다.

어릴 적 남다른 성 정체성을 고민하면서도 애써 외면한 채 성장한 그는, 짧았던 이성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 실패와 깊은 성찰 끝에 서른 살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커밍아웃을 했다. 그는 이때 "본성 깊이 내재된 나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해 다시는 사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로부터 3년 뒤 HIV 감염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수치심과 공포,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내며 인권변호사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됐던 만델라가 27년 만인 1990년 출소하면서 민주화가 싹을 틔울 무렵, 남아공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오늘날의 천형으로 불리는 에이즈의 대유행이었다.

민주화에 저항하는 극심한 테러와 급속히 확산하는 에이즈로 나라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이런 가운데 캐머런은 HIV 감염자들의 인권 소송을 이끌며 자신의 역할을 해나갔다.

드디어 1994년 만델라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수립되고, 남아공은 17가지의 차별 금지 사유를 명시한 진보적인 헌법을 갖게 됐다. 캐머런은 인권변호사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판사에 임명되지만 3년 만에 에이즈 발병으로 죽음에 직면한다.

그 무렵 개발된 에이즈 치료제인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그는, 자신의 HIV 감염 사실을 대중 앞에서 공개한다. 그러면서 수백만 명이 비싼 치료제를 구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데 자신은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후 캐머런은 가난한 환자들도 에이즈 치료제 혜택을 볼 수 있게 제도를 만드는 싸움을 시작한다. 만델라의 후임인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비과학적인 에이즈 부정론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중보건 체계를 통한 치료제 보급을 거부했고, 이로 인한 희생자가 33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결국, 싸움은 긴 소송 끝에 환자들 편에 섰던 캐머런과 치료행동캠페인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2004년 말부터 치료제가 대규모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캐머런은 책 전반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힘겨운 승리와 남아공이 이룩한 성과가 '법의 정의'를 통해 이뤄졌음을 강조한다. 법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는 억압의 수단이었으나, 용기 있는 행동가들에게는 투쟁의 무기였다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남아공의 헌법과 입헌 민주주의에 보내는 캐머런의 신뢰는 고난 속에서도 평생을 간직해온 법조인으로서의 신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남아공에서 일궈낸 정의는 세상의 지독한 낙인과 배척에 굴하지 않고 소수자의 편에 섰던 캐머런과 같은 용기 있고 양심적인 행동가들 때문에 더욱 큰 가치를 갖는다.

캐머런은 "게이이면서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은 내가 인간을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그리고 양심적이면서도 유능한 판사가 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다.

역자인 김지혜 강릉원주대학교 교수는 신임 헌법재판소장으로 지명된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권유로 책을 번역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후마니타스 펴냄. 416쪽. 1만8천원.

abullapi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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