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암벽에 불어넣은 '백제의 미소'

입력 2017-06-11 08:01  

[연합이매진] 암벽에 불어넣은 '백제의 미소'

(서산=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마애불(磨崖佛)은 깎아지른 벼랑의 바위나 아기자기한 바위에 새겨놓은 불상을 말한다. 기원전 2∼3세기 무렵 인도에서 탄생한 마애불은 4세기 중엽 중국을 거쳐 7세기 전후 백제문화권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후 우리 산야 곳곳의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미륵 세상에의 염원을 바위에 새긴 조각품이지만 어느 문화유산보다 자연과 예술, 종교와 삶이 함께 어우러진 문화유산이다.




하늘과 가까이 맞닿은 곳, 깎아지른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심을 갖게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술품이 바로 백제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이다.

김재신 문화관광해설사는 "현재 서산시 운산면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사비로 가는 길목으로 선진문물이 백제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면서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조성된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아침저녁으로 또 계절에 따라 다른데 보는 이들에게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게 하는 걸작품"이라고 말한다.

고풍저수지를 지나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 식당 '용현집' 앞에서 다리를 건너 꼬불꼬불한 계단을 올라가면 관리사무소를 만난다. 이곳에서 불이문을 거쳐 산길을 조금 오르면 1천300년 넘게 웃고 있는 마애불이 반긴다. 부처마다 웃고 있는 모양이 가지각색이지만 그 웃음이 넉넉하여 '백제의 미소'라 부른다.

석공이 벼랑의 바위에 매달려 정과 망치로 화강암을 쪼아 미소를 빚었는데, 햇살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머금는 미소가 천차만별이다. 오랜 세월 눈과 비바람의 세파에도 그 미소는 변함이 없다. 시공을 뛰어넘는 감동이 충만한 공간이다.

계곡 물이 흘러 접근하기 힘든 절벽 중간,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는 약간 기울어진 바위벽에 여래삼존불을 새겨놓았다. 차디찬 바위에 생명을 불어넣은 장인의 공간 선택이 절묘하다.

삼존불은 6∼7세기 동북아시아에서 유행한 보편적 형식이지만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입상보살과 반가보살이 함께 새겨진 것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 신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마애삼존불은 정동 쪽을 향하고 있는데 현재를 나타내는 석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과거를 뜻하는 제화갈라보살입상과 미래를 의미하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좌우에 협시불로 서 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에 늠름히 서 있는 석가여래입상은 둥글고 풍만한 얼굴 윤곽에 반원형의 눈썹, 얕고 넓은 코, 살구씨 모양의 눈을 크게 뜨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근엄한 부처님이라기보다는 당시 백제사람들의 따뜻한 낯빛과 심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온화한 모습이다.

높이 2.8m에 이르는 여래입상은 바닷길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근심을 물리치고 소원을 이루게 해주려는 듯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높이까지 올린 시무외인과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내린 여원인을 하고 있다. 연꽃 주위에 불꽃무늬를 새겨 넣은 보주형(寶珠形) 광배에는 작은 화불(化佛) 3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에게 '장차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남긴 연등불의 보살일 때 이름이다. 연등불은 석가가 보살일 때 연등불이 지나가는 길이 질척한 것을 보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밟고 지나가게 했다. 제화갈라보살입상은 두 손으로 보주를 들고 있고, 다양한 무늬와 꽃으로 장식된 보관을 쓰고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기와 같은 미륵반가사유상 역시 미소가 일품인데, 장난기가 가득하면서 해맑게 웃고 있다. 오른발을 왼무릎 위에 올린 자세로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며 엷은 미소를 띤 반가사유상의 모습이지만 다른 반가사유상에 비해 통통하게 살이 쪄 있다.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59년 보원사와 관련된 유적을 조사하던 중 그 마을의 나무꾼이 들려준 이야기가 단서가 되어 발견됐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印)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짱돌을 쥐어박으려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마애여래삼존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됐고, 1965년 불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보호각이 설치됐다. 습기가 차는 등 훼손 정도가 심각해 논쟁 끝에 2007년 보호각을 완전히 철거해 41년 만에 다시 자연채광에 의한 '백제의 미소'를 만날 수 있게 됐다.





◇ 한때 1천여 승려 머물던 대가람 보원사


동아줄에 의지한 채 그 숱한 시간 미륵세상에 대한 염원을 벼랑 바위에 새긴 석공의 정성을 떠올리며 마애삼존불에서 1㎞가량 떨어진 보원사지(普願寺址ㆍ사적 제361호)로 발걸음을 옮긴다. 연초록으로 둘러싸인 보원사지에 내리는 따사로운 햇살은 빈터의 쓸쓸함보다는 안온한 느낌이다. 백제 때 창건돼 고려 초 크게 번창했던 폐사지에는 석조(石槽ㆍ보물 제102호), 당간지주(幢竿支柱ㆍ보물 제103호),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 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ㆍ보물 제105호), 법인국사 보승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어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철조여래좌상(높이 150㎝, 무릎너비 118㎝, 두께 86㎝)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앉아 있다.

김재신 문화관광해설사는 "보원사는 가야산 일대에 99개 암자를 거느린 화엄십찰 중 하나로 한때 1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을 정도로 대가람이었다"면서 "고려 광종 때 왕사와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坦文ㆍ900∼975)이 머물던 당대 최고 사찰이 어찌 쇠락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분지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당간지주는 보원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기나긴 세월을 견뎌왔다.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당을 거는 깃발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지탱해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높이 420㎝, 폭 37㎝의 화강석 돌기둥은 92㎝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보기 드물게 당간을 받치는 간대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당간은 없어졌고, 두 돌기둥 사이로 무심하게 허공을 찌르고 있는 오층석탑의 찰주가 보인다.







당간지주에서 서른 걸음쯤 옮기면 화강석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석조가 눈에 들어온다.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로 평평한 내부 밑바닥의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라고 한다.

석조에서 쉼 없이 지절대며 흐르는 개울을 지나면 석축 위에 오층석탑이 늘씬한 자태를 뽐낸다. 금당 터 앞에 세워져 있는 오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고려 전기의 탑이다.

아래 기단 옆면에는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고, 윗기단 옆면에는 아수라ㆍ건달파ㆍ야차ㆍ가루다 등 불법을 지키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팔부중상은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나는데 서쪽 면에 새겨진 아수라 상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다. 상륜부에는 머리 장식의 무게 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인 찰주만 남아 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기나긴 세월 동안 빈터를 지켜온 오층석탑에서는 아직도 장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 끝이 살짝 올려진 것은 백제계 양식이고,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 지역에 신라 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오층석탑 뒤 석축 계단을 오르면 광종의 지시로 세운 법인국사 보승탑이 우뚝 서 있다. 법인국사는 광종 19년(968)에 왕사, 광종 25년에는 국사로 지내다가 보원사에서 입적했다. 오층석탑과 같이 서까래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는 법인국사보승탑은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부도탑으로 팔각원당식의 부도다. 조성 내력과 연대도 분명해 보물로 지정됐고 조각이 매우 화려하다. 지대석 위의 8각형 기단부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됐다. 하대석에는 안상(眼象)이 음각되고, 중대석 굄돌에는 구름과 연꽃 사이로 용이 새겨져 있다.







바로 옆 보승비의 비문 높이는 230㎝, 폭은 115㎝에 달한다, 비 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비문의 글자 수만 5천여 자에 달한다. 비의 내용은 법인국사의 일대기로 경종 3년(978)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화창한 봄날에 둘러보는 폐사지는 비어서 충만을 넘어 '다디단 초록'이 주는 생명력이 발걸음에 힘을 더해준다. 이곳에서 산자락을 하나 넘으면 백제 의자왕 때 혜감국사가 세웠다는 개심사(開心寺)에 이른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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