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한열을 사는 사람]⑤ '온몸으로 열사보낸' 이애주교수

입력 2017-06-07 10:00   수정 2017-06-07 10:09

[오늘의 이한열을 사는 사람]⑤ '온몸으로 열사보낸' 이애주교수

'시국춤·정치춤' 상징…이한열 장례식서 운구행렬 이끌며 고인의 넋 달래

"1987년 그날 춤의 본질 깨달아…이한열뿐 아니라 6월항쟁 전체를 보인 춤"

이 열사 쓰러진 6월9일 '씨·물·불·꽃, 생명의 춤' 다시 추며 '추모의식'




(과천=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987년 7월9일 오전 7시. 연세대 정문 앞에 수십만명이 운집했다. 꼭 한 달 전인 6월9일 연세대 앞 반정부 시위에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가 7월5일 끝내 숨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파였다.

운구 행렬 앞에는 흰 민복(民服) 치마와 저고리에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작은 체구의 여성이 섰다.

그는 풍물패 장단을 따라서 팔을 엇갈아 들어 올렸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멍석에 둘둘 말렸다가 풀어지고서 멍석을 헤치고 일어나기도 했다.

21살 청년이 쓰러진 자리에서 선 그가 삼베 천을 둘로 가르며 두 팔을 뻗고 한 걸음씩 나아갔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군중은 조용히 숨죽이고 지켜봤다. 유족은 그대로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의 춤은 연세대 정문을 지나 신촌로터리, 아현역을 거쳐 서울시청까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초여름 불볕더위에 혼이 나갈 정도로 격정적인 춤사위를 내뿜던 그가 쓰러지면 누군가 옆에서 일으켜 세웠고, 그는 벌떡 일어나 다시 춤을 이어갔다.

이 열사의 장례식 날 이렇게 운구 행렬을 인도하며 온몸으로 넋을 기리며 고인을 떠나보낸 이는 이애주(70)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그가 선보인 춤은 '시국춤' 또는 '한풀이춤'으로 불렸다. 정식 명칭은 '바람맞이춤'. 바람을 맞아 생명을 잇는다는 뜻이다.






이 열사 사건 30주년을 맞아 경기도 과천의 '한국전통춤회 전수원'에서 만난 이 교수는 "'춤은 사회다', '춤은 정치다' 이런 말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했었는데 1987년 바로 그날, 현장에서 춤의 본질을 비로소 체득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 보유자인 이 교수는 전통춤의 대가다. 5살 때 춤을 시작해 1954년 김보남 선생, 1970년 한영숙 선생을 사사하며 '춤꾼'의 길을 걸었다.

1971년부터 서울대, 동덕여대 등에서 우리 춤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한 그는 이 열사 장례식에서 보인 춤사위로 주목받으며 '시국춤' 또는 '정치춤'을 추는 사람의 상징이 됐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노동자, 학생들이 모여 밤샘 농성을 했습니다. 나한테도 발언하라고 하기에 '그보다는 춤을 추겠다'고 했습니다."

이 교수는 "당시 이한열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한다 했었는데 외신 기자들도 많이 모이는 만큼 '민족적'인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춤으로 민족적인 것을 표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지는 '불춤'부터 멍석에 말려서 내동댕이쳐지는 '멍석말이'까지 여러 춤을 췄다"면서 "나 자신을 내놓지 않고는 못 추는 춤이었다"고 회상했다.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 참여하고자 전국의 풍물패, 문화패 등이 한데 모이면서 이 교수는 전날 밤새 바람맞이 춤을 가르치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바람맞이 춤을 설명할 때 이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서울 종로구 혜화동의 '연우무대' 개관 공연에서 처음 선보이고서 계속 춰온 춤이다.

이 교수는 "바람맞이는 '씨', '물', '불', '꽃' 이렇게 '씨물불꽃'의 춤이다. 마치 생명의 한 부분처럼 싹이 나고 물을 주고, 가지와 잎, 꽃이 피고 그런 과정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고,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죽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이한열 열사뿐 아니라 87년 6월 민주항쟁 전체를 춤춘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대 교수로서 시국을 표현한 춤을 춰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 교수는 "1974년 '이애주 춤판'을 했는데 이후 극장을 빌리기 어렵더라"고 씁쓸히 말했다.

그러나 그는 "춤과 예술이 어떻게 '꽃길'만 걷겠나"면서 "연꽃이 피려면 흙탕물이 필요하듯이 민중의 삶이 꽃피우려면 고난의 길이 필요하고 춤으로 표현할 뿐이다"고 덧붙였다.






어느덧 70대에 접어든 이 교수는 여전히 춤을 춘다고 한다. 제자들과 함께 승무의 한 동작을 수차례 연습하고, 전통춤을 배우러 승무 연구·전수원을 찾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부분은 무용 전공자지만 그의 '시국춤'을 기억하고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1987년을 겪은 20대, 30대가 세월이 흘러 자녀와 오기도 한다고 이 교수의 지인은 귀띔했다.

이 교수는 이달 9일 또 한 번 사람들과 바람맞이를 춘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이자 이 열사가 쓰러진 바로 그 날이다. 2007년 이한열 추모 20주기에서 췄던 '상생 평화의 춤'과는 같지만, 또 다르게 춤출 것이라고 그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춤의 제목은 그 무엇도 아닌 '이한열' 자체"라면서 "상생의 길을 닦아나가는 '베 가르기'를 통해 이한열이 다시 태어나 시민들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신의 춤을 '공연'이 아니라 '의례'라고 규정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치르듯 이한열 열사 죽음 이후 30년을 되돌아보며 새기기 위한 의식이라는 것이다.

"촛불이 새로운 정치를 탄생시킨 것처럼 춤도 '혁명'입니다. 춤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고 새롭게 정립되죠. 바람맞이에는 그 시대, 그날의 기운이 들어 있어요."

ye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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