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수부터 오세창까지…황초령비 탁본에 쓰인 글의 비밀은

입력 2017-06-06 11:21  

박규수부터 오세창까지…황초령비 탁본에 쓰인 글의 비밀은

이경화 연구원, 1938년 中서 돌아온 서울대박물관 탁본 분석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다산(多山) 박영철(1879∼1939)은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였지만, 수집한 유물을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에 기증해 서울대박물관이 만들어지는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그의 유족이 1940년 경성제대에 전달한 유물 중에는 '신라왕정계비'(新羅王定界碑) 탁본 족자도 있었다. 신라왕정계비는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이 6세기 중반 함남 함흥 황초령에 세운 비석으로, 서울 북한산 비봉과 경남 창녕, 함남 이원 마운령에 건립했던 비석과 함께 '진흥왕순수비'로 불린다.

박영철이 기증한 황초령비 탁본은 그가 1938년 중국 베이징 류리창(琉璃廠)에서 구매한 것이다. 이 탁본이 특별한 이유는 비문의 사방에 한국과 중국 문인 10여 명이 빽빽하게 쓴 제발(題跋·감상과 비평을 기록한 글) 13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경화 서울대박물관 연구원은 지난 2일 학술모임 '문헌과 해석'에서 이 탁본의 제발을 통해 탁본이 중국으로 넘어간 경로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원은 제발 가운데 분량이 가장 많은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의 글에 주목했다. 오세창은 탁본의 아래쪽에 "김약산 상공이 연행(燕行) 시에 이 탁본을 지니고 가서 동예감 문찬에게 주었다. 이에 동예감이 직접 우측에 연기를 썼으니 지금으로부터 칠십 년 전 기사년 초봄이었다"고 적었다.

오세창의 제발에서 김약산은 조선 말기 문신인 약산(藥山) 김유연(1819∼1887)을 지칭한다. 함경도 관찰사를 두 차례 지냈던 김유연은 1868∼1869년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에서 만난 동문찬(董文燦, 1839∼1876)에게 탁본을 건넨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찬은 산시(山西)성 훙둥(洪洞) 출신으로 금석학과 관련된 저작을 많이 남겼다.

그렇다면 김유연은 왜 탁본을 동문찬에게 선물했을까. 이 연구원은 "청나라에서 고증학과 금석학이 유행하면서 청조의 학자들은 조선과 일본의 희귀한 비석까지 보고자 했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 문사들이 청나라 문인과 긴밀하게 교류할 수 있도록 이어준 매개물 가운데 하나가 조선의 금석문이었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동문찬이 연암(燕巖)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론자인 박규수(1807∼1876)에게 1872년 탁본을 보여주고 제발 작성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박규수는 1861년 처음 중국을 찾아 중국 문인과 사귀었고, 귀국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이어갔다.

이 연구원은 "박규수는 이국 문인의 서재에 놓인 신라 고비(古碑)의 탁본을 보고 감격했을 것"이라며 "김유연이 동문찬과 만났던 것도 박규수와 청조 문인간의 관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1872년 박규수의 연행에는 오세창의 부친인 오경석(1831∼1879)이 함께 갔다. 이와 관련해 오세창은 제발에 "박상공이 임신년 연행할 때 선친 또한 동행했다. 이를 대하고 어루만지며 옛 생각에 잠기니 저절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썼다.

이 연구원은 "이 탁본을 제작한 사람은 1868년 연행을 떠나기 전 함경도 관찰사였던 김유연일 확률이 높다"며 "조선과 청조 문인이 우의를 다진 대상이었던 탁본은 어느 시기엔가 류리창의 매물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영철이 우연히 족자를 구입해 오면서 탁본은 70년 만에 국내에 돌아왔고, 그는 탁본을 가져온 뒤 오세창은 물론 김유연의 후손인 김사연(1896∼1950) 등과 함께 감상했다"고 덧붙였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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