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조선 첫 國母 '신덕왕후'의 얄궂은 운명

입력 2017-07-14 08:01  

[연합이매진] 조선 첫 國母 '신덕왕후'의 얄궂은 운명

제3대 王 태종은 왜 그녀를 미워했을까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 골육지쟁(骨肉之爭)의 배경에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된 신덕왕후가 있었다. 그녀의 사후에 왕권을 거머쥔 태종은 신덕왕후 능을 사대문 밖으로 옮기고 능의 병풍석을 청계천 다리를 놓는 데 쓰는 등 응징에 나섰다.

"정릉이 누구 능이야?"라는 교수의 질문에 서연(배수지)은 "정조? 정종? 정약용?"이라며 우물쭈물한다.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건축학개론'의 주인공 서연과 승민(이제훈)의 달곰한 첫사랑은 정릉을 매개로 시작된다. 둘이 첫인사를 나눈 곳도 단풍이 곱게 물든 정릉의 홍살문 앞이었다.

정릉(貞陵)은 바로 조선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1396)의 능이다. 그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강 씨 집안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향처(鄕妻·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 풍습에 따라 그녀는 태조의 경처가 됐다. 금실이 좋은 둘 사이에는 아들 방번과 방석, 딸 경순이 있었다. 향처 한씨가 조선 건국 전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선 최초의 왕비 자리는 자연스럽게 강 씨에게로 돌아갔다.

이성계와 강 씨의 첫 만남에 관한 일화는 흥미롭다. 고려 말 호랑이 사냥에 나선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름다운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가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돼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성계는 그녀의 미모와 사려 깊음에 반해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둘의 만남은 서연과 승민의 첫 대면만큼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 태종이 미워한 부친의 京妻


신덕왕후는 1392년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며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태조 5년(1396)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나이 4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년 후 왕자의 난 때는 첫째 부인의 아들 방원(태종)에게 방석도 죽임을 당한다.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한 태조는 통곡하며 상복을 입은 채 직접 능 자리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능은 한성 황화방 북쪽 언덕(현 중구 정동 영국대사관저로 추정)에 조성됐다. 조선 최초의 왕릉이었다.

태조 사후에 드디어 태종의 앙갚음이 시작됐다.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더니 1409년에는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이 옳지 않다며 능을 아예 양주 남사아리(현 정릉)로 옮겨버린다. 정릉동이었던 곳이 지금 정동(貞洞)으로 불리게 된 이유다. 태종은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만 함께 모셨고, 신덕왕후는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종은 신덕왕후가 세상을 뜬지 20년이 지나서도 "강 씨는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신덕왕후는 이후 260여 년이 지난 현종 10년(1669)에야 비로소 왕비로 추존돼 종묘에 배향된다. 이때 정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 조선 초기 왕릉 모습 간직한 정릉



정릉은 서울 성북구의 비탈진 주택가 위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 역에서 버스를 타고 정릉 입구 정류장에 내려서도 비탈을 10분 정도 올라야 닿는다. 정문을 들어서면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초록빛을 머금은 싱그러운 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정릉은 조선 왕릉치고 소박하다. 그래선지 서울 도심 속에 이렇게 평온하고 정갈한 곳이 있겠느냔 생각이 든다.

홍살문을 지나 참도를 따라가면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수를 준비하는 수라간, 비각에 닿는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능이 일직선 상에 놓여 있지만, 정릉은 특이하게 홍살문에서 정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ㄱ 자로 꺾여 있다.

비각에 있는 표석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大韓 神德高皇后貞陵'(대한 신덕고황후정릉)이 새겨져 있다. '대한제국 신덕황후의 정릉'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 때인 광무 3년(1899) 고종이 황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옛 비석의 표면을 갈고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뒤쪽을 보면 비석과 받침돌 사이에 간격이 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비석 뒷면에는 고종이 직접 쓴 신덕왕후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역시 이곳에서도 그녀의 출생연도는 찾아볼 수 없다.

정자각 뒤편 언덕 위에는 능이 들어서 있다. 능에서 보면 숲에 둘러싸인 아담하고 정갈한 경내와 주변 아파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일반적인 조선의 왕릉 규모로 보면 봉분이 작다. 능을 옮기고 묘로 격하되며 봉분이 작아졌다고 한다.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 석물이 서 있다. 이 중 고려 양식을 계승한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魂遊石·무덤 앞에 놓은 직사각형 돌) 밑의 고석(鼓石·북 모양 석물)만 조성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 석물은 현종 때 세운 것이다. 왕릉의 고석은 흔히 4~5개인데, 이곳에는 2개뿐이고 혼유석에 비해 지나치게 크기가 큰 것을 보면 능을 옮길 때 나머지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사각 장명등은 조선 능역의 석물 중 가장 오래됐다. 정자각 왼쪽 뒤편에 있는 소전대(燒錢臺·제사를 지낸 뒤 축문을 태우는 석물)도 조선 초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9월 23일 신덕왕후를 기리는 제사가 진행된다.







◇ 태조가 극진히 사랑한 신덕왕후



신덕왕후에 대한 태조의 사랑은 극진했다. 신덕왕후가 위독할 때는 승려 50명을 모아 불공을 드렸고, 사후에는 능 동쪽에 흥천사(興天寺)라는 170여 칸의 큰 절을 지어 명복을 빌었다. 말년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흥천사를 찾았는데, 태조실록에는 "백관이 반열을 정돈했는데 조회를 보지 않고 흥천사로 거둥했다"고 기록돼 있다.

흥천사는 지금 정릉 인근에 있다. 신덕왕후 사후처럼 절의 뒤안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1504년 화재 이후, 1510년에는 유생들의 방화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1669년 신흥사(新興寺)라는 이름으로 재건됐고 이후 정조 18년(1794) 현재 자리로 옮겨 흥천사를 계승했다. 고종 2년(1865)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요사를 짓고 중창한 뒤 흥천사라는 이름을 다시 갖게 됐다.

흥천사 대방에는 흥선대원군이 절을 중창하고 친필로 적은 '興天寺'(흥천사) 현판이 있고, 극락보전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현판에 남아 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는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피란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극락보전과 명부전 등이 있다. 현재 흥천사는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제대로 된 모습은 내년에나 볼 수 있을 것 같다. 흥천사에서는 신덕왕후 기일에 맞춰 2012년부터 다례재를 봉행하고 있다.







◇ 정릉 병풍석으로 만든 돌다리 '광통교'



1409년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옮기면서 봉분을 깎고 정자각을 헐었다. 석물은 모두 땅에 묻도록 했다.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인 청계천의 광통교가 흙으로 만들어져 홍수 때면 곧잘 무너지자 이듬해 여름에는 정릉의 병풍석으로 돌다리를 만들게 했다. 공사 중 일부 병풍석이 거꾸로 놓였지만 고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무덤에까지 모욕을 주는 처절한 복수였다.

도성 최초의 석교인 광통교는 어가(御駕)와 사신(使臣)이 지나가는 도성의 중요한 통로였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한 해의 액운을 없애준다는 다리밟기를 하고 연을 날렸다. 그야말로 모든 백성이 신덕왕후가 남긴 것을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광통교는 1910년 다리 위로 전차가 다니면서 훼손됐고, 1959년에는 청계천이 복개되며 도로 아래 묻혔다. 광통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계천복원사업 때였다. 청계천을 정비하면서 보호하기 위해 현재 광교 위치에 있던 광통교를 상류 쪽으로 155m 옮겨 복원했다.

광통교 교각 아래로 들어서면 벽면에서 그 옛날 정릉을 두르던 병풍석과 우석(隅石·병풍석 사이를 잇는 돌)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돌에는 당대 최고의 석공이 새긴 정교한 조각과 아름다운 문양이 남아 있다. 신장(神將)이 거꾸로 서 있는 병풍석도 볼 수 있다. 세련된 조각에서는 신덕왕후를 향한 태조의 깊은 마음이 묻어나는 듯하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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