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가장 사랑한 색 '빨강', 그 은폐된 역사

입력 2017-07-16 12:13  

인류가 가장 사랑한 색 '빨강', 그 은폐된 역사

신간 '빨강의 문화사'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빨강은 역사적으로 인류가 가장 아끼고 애용한 색이지만 그 기원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 좌파 등 현대 들어 빨강에 부여된 선명한 정치적 의미가 빨강에 대한 의식적인 선호나 사유를 기피하도록 만든 점을 하나의 이유로 들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바르는 많은 붉은색 제품에 함유된 색소가 '코치닐'(연지벌레)이란 곤충에서 추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빨강이 지닌 매혹적인 느낌과 낭만성을 해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신간 '빨강의 문화사'(컬처룩 펴냄)는 신화, 종교, 과학, 언어학, 고고학, 인류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빨강의 변화무쌍한 일대기를 추적한다.

저자인 스파이크 버클로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예술사 박사학위를 받은 회화 복원 전문가로, 현재 케임브리지대 피츠윌리엄 박물관 산하의 해밀턴 터 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빨강의 역사는 오래됐다.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 빨간색으로 그려진 소가 단골 주제로 등장하는 것을 비롯해 빨강이 오래전부터 인류사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은 많다.

인류가 찾아낸 대표적인 빨강의 원천은 진드기류의 빨간색을 띤 벌레였다. 그중에서도 질 좋은 빨강을 제공하는 코치닐은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값비싼 코치닐을 십일조나 지대로 납부했다는 9세기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다 신대륙 원주민들이 양식하던 코치닐이 싼값에 유럽에 공급되면서 사용량이 급증했다. 코치닐은 이내 신·구대륙 주요 교역품으로 떠올랐고 국제무역 질서까지 바꾸는 등 세계사에 우리가 몰랐던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용도에 따라 동물, 식물, 광물로부터 다양하게 채취되던 빨강은 19세기 인공적으로 합성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콜타르에서 추출한 아닐린을 원료로 빨강 염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면서 합성염료산업은 막대한 부를 안겨주는 신산업으로서 화학 혁명의 견인차 구실을 했다. 당시 독일 염료상인이 세운 바이엘은 덩굴풀인 꼭두서니에서 뽑아 쓰던 빨강 염료와 같은 성분의 알리자린이란 염료를 처음 합성하면서 굴지의 화학 회사로 성장했다.

오늘날 붉은 깃발은 흔히 공산주의, 좌파, 혁명,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이다. 그들의 군대는 '적군'과 '홍군'으로 불렸다.

하지만 사실 빨강은 각 나라의 국기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색이다. 전 세계 80%의 국기에 빨간색이 포함돼 있다. 현대의 토템이라 할 수 있는 국기에 빨강이 이처럼 널리 사용되는 것은, 국가를 세우고 독립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헌신', '용기', '저항'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빨강은 혁명의 색이기 이전에 왕의 위엄과 헌신, 정치적 인내심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빨강은 왕실과 귀족들이 선호하는 색이었다. 옛날 임금이 입던 용포가 붉은색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18세기 프랑스에선 빨강이 귀족 계급의 표식이었다. 빨강은 베르사유 궁전을 드나들 수 있는 신분증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사실 빨강은 계급과 계층을 떠나 누구나 좋아하는 색이었다. 정해진 이유가 있어 좋아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색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붙였다고 해야 더 맞을 듯하다.

서양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피는 빨강에 '신성함'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깊게 새겨넣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적(赤)'은 교회 권력을, '흑(黑)'은 국가 권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빨강은 종교, 신성, 경건함을 뜻하는 동시에 세속적 사랑, 불경, 관능, 퇴폐미를 표현하기도 한다.

영국 남웨일스 해안에서 발견된 3만4천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빨간색 의상을 걸치고 유골이 적토로 착색된 탓에 '붉은 숙녀(Red Lady)'로 불리게 됐다. 19세기 인류학자들은 유골의 주인을 매춘부나 마녀로 간주했는데, 이는 빨강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반영한다. 20세기 들어 유골은 20대 후반의 남성 주술사의 것으로 정정됐다.

빨강이 오랫동안 인류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이유는 무얼까.

흔히 빨강이 특별한 것은 피가 빨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이 같은 추론을 뒤집는다. 피가 빨갛기 때문에 빨강이 특별해진 것이 아니라, 빨강이 특별한색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여러 체액 중에서 유독 피가 주목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책은 빨강이 관심을 받는 다른 이유로 서로 상반된 것 사이에서 꿈틀대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모습과 빨강이 지닌 속성이 닮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내놓는다.

빨강은 때로는 삶을, 때로는 죽음을 상징한다. 때로는 열정과 빛을, 때로는 수난과 어둠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빨강은 흑과 백의 사이에 놓인,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모든 색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빨강이 서로 적대하는 것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빨강이 검정과 하양의 정중앙에 있다고 봤다.

실제로 문명 발달이 더뎌 인류의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일부 부족사회에선 빨강을 검정과 하양 사이에 존재하는 유일한 색으로 믿고 있다.

저자는 "빨강은 야누스의 얼굴을 한 색이며, 빨강이 에너지가 풍부한 까닭은 검정과 하양 모두와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영기 옮김. 448쪽. 2만2천원.

abullapi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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