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박석무 이사장이 전하는 다산의 가르침

입력 2017-08-12 08:01  

[연합이매진] 박석무 이사장이 전하는 다산의 가르침

"공직자가 공렴(公廉)하지 않으면 나라 제대로 될 수 없다"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개혁가이다.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발명한 과학자이자 현실 참여적인 시를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공정과 청렴에 기반해 공직 생활을 하고 18년간의 귀양살이 중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집필해 공렴(公廉)과 개혁을 쉼 없이 주장했다.

최근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삶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박석무(76)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부패하고 썩은 나라를 개혁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다산의 200년 전 주장이 지금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의 기대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박 이사장은 평생을 다산을 연구하고 '다산 정약용 평전'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다산 기행' 등을 저술한 다산 전문가이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다산연구소에서 박 이사장을 만나 다산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다산 정약용은 어떤 인물입니까.

▲ 다산은 기본적으로 학자이자 사상가죠. 단순히 이론 위주의 학자가 아니라 탁월한 행정가였어요. 또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경세가(經世家,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였어요. 조선 후기 경세치용, 실사구시, 북학 등 모든 실학의 학파를 연구해서 집대성한 사람이기도 하죠.



-- 어떻게 다산을 연구하게 됐습니까.

▲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역사가 올바르게 가고 국민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이기를 바라는 것이 집안의 내력이었던가 봐요. 증조부가 유학자인 민재 박임상(1864~1944) 선생입니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는데 전통을 지키고 사특한 것을 배격하는 위정척사 운동을 함께했죠. 증조부는 일제의 지배를 받는 것을 평생 통한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고민했어요.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가풍을 제가 이어받았나 봅니다.

고교 시절 4·19 혁명에 참여했고, 대학 때인 1964년에는 한일협정반대운동을 하다가 1965년 구속돼 강제로 군대에 갔죠. 군대를 다녀오니까 삼선개헌 반대운동이 또 시작됐어요. 대학 생활은 정말 시위로 시작해서 시위로 끝이 났죠. 시위만 하다 끝나면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을 가기로 했어요. 교수 한 분이 한국 법제사를 연구해보라고 하더군요. 관련 책을 찾다 보니까 일본인이 쓴 '조선법제사고'라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정약용의 '경세유표'를 연구한 것이었죠. 그때부터 다산을 연구하기로 했어요.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썼고, 1979년에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을 번역해서 내놓았죠. 부끄럽지만 이렇게 다산 전문가가 됐습니다.



-- 요즘 언론에서 다산에 대한 언급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 올해는 다산 정약용이 귀향지인 전남 강진에서 대표 저서인 '경세유표'를 저작한 지 2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경세유표'의 주요 내용은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겁니다. 부패하고 썩은 나라를 이대로 두면 망하니까 모든 법제를 고쳐 망국을 막아야 한다는 거죠. 요즘 말로 하면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거예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 적폐를 청산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이 200년 전 다산의 주장과 맞아떨어지죠. 그러다 보니 요즘 다산이 자주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 다산은 개혁을 주장했지만 결국 조선은 멸망합니다.

▲ 흔히 다산을 '실패한 개혁가'라고 말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혁은 아무리 주장을 해도 실행할 사람이 없으면 성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산은 개혁의 방안을 마련했지만 당시 개혁의 주체가 없었고 또한 다산 자신은 죄인의 몸이어서 개혁에 나설 입장이 아니었죠.

다산은 자신이 개혁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세유표'를 쓴 거예요. 경세유표에서 '유표'(遺表)는 '유언으로 남기는 표'라는 뜻이에요. '표'라는 것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정책 건의서죠. 다산은 임금에게 이것을 바쳐서 나라에서 이런 내용으로 개혁하고 법제를 바꾸라고 했습니다. 다산은 죄인으로서 임금에게 건의할 자격이 없고 상소 하나도 올릴 수 없지만 썩고 망해가는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으로서 두고 볼 수가 없어 방안이라도 만들어놓을 테니까 먼 훗날이라도 자신이 만든 정책을 실행해 보라고 한 겁니다. 오늘 당장 실행하지 못해도 10년이나 100년, 200년 후에라도 가감해고 보완해 시대에 맞는 논리로 국가를 개혁하라는 뜻이죠. 정약용은 유배생활에서 벗어난 뒤 '사암'(俟菴)이라는 호(號)를 사용합니다. "나의 학문을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릴 것"이라며 자신을 스스로 '기다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 거죠.



-- 다산이 제시하는 핵심 사상은 무엇입니까.

▲ 다산은 28세에 치른 과거시험에서 문과에 급제했어요. 당시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은 운명이 바뀔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죠. 엄청난 명예이자 인생이 보장되는 거죠. 다산은 과거에 합격하고 집에 돌아와서 '문과 급제하고 나서'란 시를 짓습니다. 바로 여기에 삶의 목표를 정해놓았죠. 시 구절 중 '둔졸난충사(鈍拙難充使)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이란 대목입니다. '둔하고 졸렬해 임무 수행이 어렵겠지만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란 뜻이죠. 공렴은 바로 다산의 생의 목표였어요.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가 어떻게 해야 공렴해지느냐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죠. 또 '경세유표'에서는 공정하고 청렴할 수 있게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렇듯 다산은 공렴에 중심을 두고 일생을 살았어요. 이런 다산의 사상은 지금 우리 시대에 딱 들어맞는 거죠. 공무원은 공(公)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사익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거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익을 추구하다 지금 이렇게 당하고 있는 거예요. 공을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죠. 다산은 공직에 있는 사람이 공정하고 청렴하지 않으면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200년 전에 명쾌하게 제시했습니다.







-- 공정하고 청렴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결국 법과 제도를 바꿔야죠. 하지만 다산은 법과 제도의 개혁만으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산은 이것을 '율기'(律己)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심신의 수양을 통해 도덕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죠. 아무리 훌륭한 법과 제도가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없고 사욕이 있는 한 법률은 공정하게 집행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합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남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고 합니다. 다산은 그다음 중요한 것으로 공공에 봉사하는 '봉공'(奉公)과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愛民)을 말합니다. 다산의 애민 대상은 불특정 다수의 백성이 아니에요. 요즘 말로 하면 바로 사회적 약자를 뜻합니다. 국가나 사회가 돌보거나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을 말하죠. 다산은 애민의 대상을 양로(養老, 노인), 자유(慈幼, 유아), 궁인(窮人, 홀아비·과부·고아·홀몸노인), 상(喪)을 당한 백성, 관질(寬疾, 병자와 장애인), 재난을 당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200년 전에 복지국가라는 이상사회를 구상한 거죠.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공렴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거죠. 다산이 설계한 대로 따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다산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망한 거예요. 새 정부도 이런 다산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과는 지켜봐야겠지요.



-- 한때 정치에 발을 담갔던 분으로서 지금의 정치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옛날에는 학문과 정치가 병행했어요. 율곡 이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학문하던 사람이 정치하고, 정치하다가 또 학문하고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정치와 학문이 서로 무관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아요. 학자는 국민의 삶을 살리는 데 도움이 전혀 안 되는 얘기만 하고, 정치인은 학문 세계와 등지고 정략과 계략으로만 정치를 하고 있죠.

역사학자인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은 경세유표를 두고 "학문과 정치가 분립한 지 오래라 학문이 정치를 버려서 그 학문이 실(實)을 얻지 못하고 정치가 학문에 의거하지 아니하여 그 정치는 언제나 치도(治道)의 본(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도(道)와 정(政)의 일치(一致)임을 밖으로 거론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세상에 없는 고독한 학문적 결단임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했어요. 학문과 정치가 따로 놀아나 치도의 근본을 잃었던 때 다산은 실학으로 정치의 근본을 제시하고, 실학에 따른 근본을 찾아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지금 정치인 중에는 공부하지 않고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많아요. 학식이 풍부하고 실천하는 힘도 충분한 정치인이 국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보면 조선 시대 당파싸움을 보는 것 같아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것과 똑같아요. 새 정부가 나라를 위해 여러 가지를 새로 설계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정치인과 관료의 자질을 보면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 현재 우리나라는 외교적인 어려움에 부닥쳐 있습니다. 다산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까.

▲ 다산은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당시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를 야만인이 세운 나라라며 배격하고, 명나라를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죠. 대부분의 선비는 청나라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사용했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산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어요. 청나라가 동양의 대국인데 이런 나라를 배척하고 어떻게 살 수가 있느냐는 거죠. 다산은 모든 저술에 청나라 연호를 썼어요. 청나라에서 과학기술을 배우고 일본의 서적도 봐야 한다고 했죠. 우리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 있다면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죠. 다산의 그런 열린 마인드에 지금 일본, 중국, 미국과의 관계를 풀어낼 방법이 들어 있지 않겠냐고 생각합니다. 다산 정신은 나라들이 서로 협력하고 제한 없이 주고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 다산은 법과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다산은 법이 오래되면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산을 개혁가라고 얘기하죠. 그는 오래된 법과 제도를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어요. 지금 헌법 체제는 1987년의 것이니까 당연히 고쳐야죠.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검찰의 과도한 권력 남용을 막고 완전한 지방자치제도 실현해야겠죠.



-- 다산의 삶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사람은 절망하면 용기가 없어지고, 또 용기를 잃으면 절망하게 됩니다. 다산은 나이 마흔에 귀양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무려 18년간이나 됐죠. 그러면서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죠. 하지만 저서 속에 절망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물론 시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절망은 없어요. 다산의 시를 보면 '조금 궁하면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있지만, 크게 궁하면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구절이 있어요.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조금 궁한 것으로 여기고 절망하지 않았죠.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라는 거죠.

몹시 추운 겨울날 귀양지인 강진에 도착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어느 주막집에 들어가니까 먹을 것을 줘요. 밥을 먹고 살만하니까 하는 첫 마디가 "이제 내가 겨를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관직 생활하고 당파 싸움하면서 책을 보거나 저술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했는데 이제 비로소 겨를이 생겼다는 거죠. 이 대목에서 다산이 좌절할 줄 모르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다산은 후세에라도 자기의 책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계속 책을 썼어요. 다산이 출생한 후 세 갑자(180년) 만에 제가 태어났죠. 제가 다산의 사상을 많이 보급했으니 다산이 이것을 알았던 것 같아요. 후세에 전해지면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리라 생각한 거죠.



-- 소개하고 싶은 다산의 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 '애절양'(哀絶陽)이란 제목의 시가 있어요. '생식기를 끊어내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죠.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시를 짓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강진의 갈대밭 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편입되고 못 바친 군포(軍布) 대신 소를 빼앗기자 칼을 뽑아 성기를 스스로 잘라버리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죠. 세금이 얼마나 가혹했으면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세금 정책을 바로 하지 않으면 이런 비극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다산은 시를 3천 수 가까이 지었는데 좋은 것이 아주 많습니다. 많은 시가 현실 참여적인 내용이죠.



-- 다산연구소는 어떤 곳입니까.

▲ 다산 정약용이 어떤 사람이고, 그의 어떤 사상을 본받아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연구소입니다. 다산의 율기, 봉공, 애민의 정신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지방자치단체에 주는 '다산목민대상'을 제정하고, 다산의 차(茶) 정신을 기리고 차 문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산다인상'을 주고 있어요. 또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산의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다산 기행'을 진행하고 해마다 다산 묘소에서 묘제도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다산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시작한 칼럼 '풀어쓰는 다산이야기'를 매주 40만 명에게 이메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칼럼은 이제 1천 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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