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⑪ 함세웅 대회장 "안타깝고 참담"

입력 2017-07-30 09:00   수정 2017-07-30 10:45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⑪ 함세웅 대회장 "안타깝고 참담"

"고난 이기고 문화 꽃피운 위대한 주체자…귀향 목표로 견뎌냈을 것"

"속죄의 심정으로 순례길 동참" "조국이 어머니 품으로 맞아야"

(이르쿠츠크<러시아>=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종교는 민족을 뛰어넘지만 때로는 민족이 종교를 넘어서기도 합니다. 고려인들의 수난사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비견되는 인류사의 비극입니다.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진다는 자세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이분들이 겪은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함세웅(75) 신부는 천주교 성직자보다는 인권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 더 잘 알려졌다. 1976년 유신 반대 투쟁으로 구속되고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 구금됐다. 이제는 현직에서 은퇴한 원로사제인데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장,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과 함께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의 공동대회장으로도 추대돼 지난 23일과 24일 러시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유적을 답사한 뒤 '극동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회상열차'에 몸을 싣고 1937년 고려인들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끌려갔던 수난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30일 열차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함 신부는 "고려인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든다"며 말문을 열었다.

"제가 2000년부터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거든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만주를 여러 차례 방문하다가 고려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처럼 혹독한 고난을 겪었는지는 상세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강제이주 후 어렵사리 터전을 다시 일구고 자리를 잡았다가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 독립국가들의 민족주의 발흥으로 또다시 핍박을 당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모국으로 귀환했는데도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안타깝고 참담한 심경입니다."

함 신부가 기념사업회 공동대회장을 맡아 회상열차에 동승해 달라는 제안을 처음 받은 것은 지난해 10월. 표완수 조직위원장(시사인 발행인)에게서 권유받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순례길에 동참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고려인들의 수난사는 이보다 훨씬 상처가 깊고 오랜 기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었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한 40년보다 긴 세월을 보낸 겁니다."

그는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를 중시한다고 설명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40년, 노아의 홍수 때 비가 내린 40일, 예수가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은 40일 등이 대표적이어서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 부활 전 40일을 사순절로 기념하며 금식과 기도를 한다. 강제이주 80년은 고난과 완결을 상징하는 40의 갑절이어서 더 큰 의미로 함 신부에게 다가왔다고 한다.

"건강이 예전 같지 않으니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습니다. 1주일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가는 것을 포함해 기간이 2주일이나 되는 데다 이동 거리도 길고 프로그램도 빡빡하니까요.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80년 전 선조들이 겼었던 고통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죠."

함 신부는 지난 4일 강정채 전 전남대 총장이 만든 광주광역시의 시민학교 무등공부방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인근 광산구 월곡동에 고려인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날은 시간이 없어 들르지 못하고 12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부동의 고려인마을 땟골을 찾았다. 그곳에서 고려인지원단체 너머의 김영숙 사무총장 등을 만나 모국 귀환 고려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들었다.

"처음 광주에서 고려인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명색이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기념사업회' 공동대회장이라는 작자가 우리나라에 고려인이 5만 명이나 살고 있고, 광주에 집단거주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까요. 안산에서도 너머 활동가들의 설명을 들으며 제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심했는지 자책했습니다."

함 신부는 안산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사는 32살짜리 고려인 3세 여성을 만났다. 한 달 수입이 200만 원 남짓 되는데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비용이 40만 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현행 법령에 따르면 3세까지만 동포로 인정하고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보육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어린이집에 보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하소연을 접하고 함 신부는 탄식했다.

"그분께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으로 온 까닭을 물었더니 '고향이어서 왔다'고 하더군요. 당신에게 고향의 의미가 뭔지 재차 물으니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그분들을 맞아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고 낯이 뜨거워지더군요. 세계적인 석학 아널드 토인비가 도전과 응전, 문화 형성의 3단계를 설파했습니다. 고려인들은 엄청난 시련을 견뎌내고 자신들만의 문화를 꽃피운 위대한 주체자들입니다."

함 신부는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쓴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이론을 인용했다.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분석해보니 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이 체념한 사람보다 생존 비율이 높았다는 것이다. 그는 "고려인들도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꿈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수난을 참고 견뎌냈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함 신부는 법과 제도를 손질해 고려인을 같은 핏줄로 받아들이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2004년 작고한 유현석 변호사가 생전에 '조선족과 고려인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선조에 대한 배반'이라고 질타했죠.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떠난 동포들은 스스로 한국 국적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외동포 선조들에게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동포 후손을 한국 국적자로 인정하는 법 개정에 나서야 합니다."

그는 나아가 우리나라를 일제강점기 재외동포들이 꿈에도 그리던 이상향으로 만들기 위해 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들이 그리던 조국은 분단국이 아니었고, 지금도 재외동포 후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면 남북의 화해와 일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번 순례길에서 고려인들의 수난을 묵상하는 것 말고도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연령과 지역과 계층과 직업과 종교를 뛰어넘어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소중한 경험이죠. 이부영 의장님이나 이창주 교수님은 물론 회상열차의 모든 대원에게 날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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