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짓이기고 촛불로 밝힌 거리의 미술…"더 거센 바람 일어야"

입력 2017-08-22 15:25   수정 2017-08-22 15:57

흙 짓이기고 촛불로 밝힌 거리의 미술…"더 거센 바람 일어야"

임옥상 개인전 '바람 일다' 가나아트센터서 23일 개막

"文 대통령 자신부터 문화·예술 즐겨달라 조언…권력 감시가 예술가 역할"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수백 수천 개 풍등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하야' '퇴진' '이게 나라냐' 물결치는 함성의 끝에는 광화문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광장에 선 사람들은 박근혜가 탄핵당했고 정권도 교체됐기에 일단락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바람이 더 거세게, 거세게 일어야 합니다."

16m에 달하는 풍경화 '광장에, 서'(2017)를 바라보던 임옥상(67) 작가는 23일부터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바람 일다'를 여는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작가를 최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작업실과 가나아트센터에서 두 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이번 전시는 작년 늦가을부터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촛불집회에서 태동했다.

작가는 주말이면 광화문을 찾아 공 차기, 못 박기, 붓글씨 쓰기, 가무단 놀이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번 전시는 그가 광장에서 온몸으로 경험한 것들의 산물이다.

30호 캔버스 108개를 이은 대작 '광장에, 서'는 "촛불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아서 미루고 미루다 완성한" 작품이다.

흙을 물감 삼아 캔버스를 뒤덮은 것이 인상적이다. 작가와 가까운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 작품을 두고 "기념비적인 역사기록화다. 그 이상의 해설이 필요 없고 불가능하다"고 격찬했다.





'광장에, 서'와 마주한 작품 '물밑 창조경제'는 정반대의 풍경을 담고 있다.

2015년 7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단 간담회'를 바탕으로 한 유화는 환한 미소의 박 전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물밑에서 촉수를 날름거리는 모습으로 기이하고 섬뜩한 느낌을 준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박근혜 정권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떠한 그림일까 하는 생각 끝에 탄생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너희가 그렇게 국민 앞에서 폼 잡고 권력을 과시해봐야, 우리 국민이 너희 속을 다 안다고 말하는 거죠. 얼마나 물밑에서 생사를 건 게임을 했을 것이며, 얼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이권 다툼과 아부와 되치기, 협잡을 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그렸습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겨눈 '용감한' 작업을 계속해온 작가도, '블랙리스트 예술가'라는 낙인에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고 토로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도 작품이 철거되는 일을 수없이 겪었지만 내가 이 나이에 또 당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당해서 좋을 것 하나도 없잖아요. 자기 검열하게 되는 분위기, 권력은 그걸 노리는 것이죠."

전시장 1층에 놓인 '가면무도회' 시리즈도 자기 검열에서 탄생했다.

2015년 IS(이슬람국가)까지 끌고 들어와 "복면 시위는 못 하게 해야 한다"고 한 박 전 대통령의 발언에 분노해 초대형 가면을 만들었지만,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알리바이용'으로 다른 정치 지도자들의 가면을 만들었다는 것.







평면과 부조 30여 점이 나온 이번 전시에서 비판과 풍자의 정신 외에도 주목해야 할 점이 재료로 쓴 '흙'이다.

회화과를 졸업한 뒤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가를 꿈꿨다는 작가는 어느 날 "분단된 나라, 독재의 시대에 내가 헛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과감히 구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민중미술가라는 칭호를 두고 "당시 정부 입장에서 불온한 친구들을 한데 묶어 칭하기 위해 붙인 것이다. 진정한 민중미술은 비판적 리얼리즘으로서 특정 예술가가 아닌, 민중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고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땅 위의 존재"인 우리를 흙으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마르면 균열이 일어나거나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택한 것이 종이였다고.

최근 흙을 얇게 캔버스에 발라 고정하는 데 성공하면서 '광장에, 서' 등 흙으로 조형화한 작업들을 선보이게 됐다.

작가는 "사람들이 흙의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사람들과 이 문제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세상에 흙덩어리를 던졌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작가는 "문화정책도 중요하지만 대통령부터 문화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돼줬으면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부터 슬리퍼를 끌고 동네미술관도 가고 영화도 보고 편안하게 문화예술을 즐기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면 우리 사회는 금방 뜬다"고 힘주어 말했다.

작가는 '정권이 바뀌었으니 임옥상은 할 일이 없어진 것 아니냐'는 일부의 시선이 있다고 전하면서 "한쪽 편들기 내지, 한쪽 편에 가담하는 존재로서의 임옥상이 말이 되느냐'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위해 예술을 한다면 할 이유가 없죠. 권력은 민중에서 나오든 무엇에서 나오든 간에 그것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어요. 그래서 잠들지 않는 영혼, 끝까지 감시하고 주시하는 예술 정신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임옥상은 위기가 아닙니다."

작가는 이달 말 도록과 저서도 발간할 계획이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문의 ☎ 02-720-1020.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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