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문학의 바다'에 풍덩 빠지다

입력 2017-10-07 08:01  

[연합이매진] '문학의 바다'에 풍덩 빠지다

(통영=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가을,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감성이 풍부해지는 가을은 책 한 권을 배낭에 넣고 소설가, 아동문학가, 시인 등의 흔적을 밟아가는 문학기행을 떠나기에 좋은 시기다. 작가들의 숨결을 추억하며 '그 길'을 따라가 본다.





◇ 통영, 자다가도 달려가고 싶은 藝鄕


통영의 미륵도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미륵산(彌勒山). 정상에는 '미륵산 461m'라는 대리석 표지석이 있는데, 이 일대는 사방으로 시야가 넓게 터져 한려해상의 진수를 조망할 수 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통영항과 한산도ㆍ비진도ㆍ소매물도ㆍ추도 등 한려수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을 때는 지리산 천왕봉과 여수 돌산도, 일본 대마도까지 다 보인다고 한다.

점점이 떠 있는 섬과 그림 같은 해안선, 은빛 물결이 떼를 지어 태양을 반사하는 푸른 바다와 떼 지어 항구로 들어오는 어선들은 한 폭의 동양화다. 바다와 산과 하늘이 어우러진 절경에 말을 잇지 못한다. 노을이 지면 바다와 섬들이 보석 같은 풍경을 빚어내는데 그 아름다움에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정지용은 통영 기행문을 통해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했듯이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이 사람들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걸출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

정상 바로 아래 당포해전 전망대가 있고, 그 옆에는 '박경리 묘소 전망 쉼터'가 있다. 박경리의 시비 '마음'이 세워져 있는 이곳에서는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이 아스라이 보인다. 미륵산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부근에 내려 나무 데크를 오르거나 미래사나 용화사를 들머리로 해 산길과 나무 데크를 오르면 된다.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고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남해안 일대에서 남해도와 쌍벽인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현해탄의 거센 파도가 우회하므로 항만은 잔잔하고 사철은 온화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통영 주변에는 무수한 섬이 위성처럼 산재한다. 북쪽에 두루미목만큼 좁은 육로를 빼면 통영 역시 섬과 별다름이 없이 사면이 바다다. 벼랑가에 얼마쯤 포전(浦田)이 있고, 언덕배기에 대부분의 집이 송이버섯처럼 들앉은 지세는 빈약하다" -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제1장 '통영' 중에서

통영시 문화동 간창골이 주 무대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해 '토지' '파시' 같은 소설에서도 통영을 끊임없이 등장시켰던 박경리(1926∼2008)에게 통영의 풍광과 함께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던 어머니의 이야기는 문학적 토양이 됐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을 현대문학에 발표했고, 소설 '김약국의 딸들'로 작가 입지를 굳혔다. 이어 한국 현대 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이자 하나의 극점으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 시작해 26년 만에 탈고했다.






박경리는 30대 초 상처를 입고 통영을 떠났고, 2004년 11월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통영을 찾았고, 2008년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미륵도 언덕에 묻혔다. 묘소 인근에는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옛날의 그 집' 시비가 세워져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박경리공원 바로 아래 박경리 동상과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에는 그의 대표작 '토지'의 친필원고와 등장인물 관계도,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무대인 안뒤산을 중심으로 한 통영의 옛 모습을 복원한 모형, 일대기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그래픽이 있다. 쪽진머리와 수수한 한복차림의 젊은 시절 사진과 어록, 작가가 직접 만든 누비저고리 옷, 평소 집필하던 원주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방도 전시돼 작가의 삶과 흔적, 문학세계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글을 '한땀 한땀 기워 나간 바느질 흔적'이라 여겼던 고인을 뒤로하고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던 김춘수(1922∼2004)를 만나러 간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동부사무소 건물을 리모델링한 김춘수 유품전시관에는 육필원고, 필기구, 안경, 시계, 도장, 옷가지 등이 전시돼 있다. 지우고 또 지우면서 쓴 습작노트에서 시인의 고뇌와 숨결이 느껴진다. 특히 시인이 생전에 기거하던 것과 비슷한 형태로 침대와 10폭 산수화 병풍, 액자 등을 넣어 꾸민 '김춘수 방'에서는시인의 일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전시된 사진 중 눈에 띄는 것은 1945년 결성된 통영문화협회를 이끌었던 인물 사진이다. 해방되자마자 일제 잔재를 걷어내는 피렌체식 문예부흥을 도모했던 유치환과 윤이상,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화가 전혁림과 김용주 등이 미륵도에서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유치환 부부의 결혼 때 화동(花童)을 했던 김춘수는 통영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1947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한 이후 82세로 타계할 때까지 '무의미의 시'라는 새로운 시론을 비롯해 20권이 넘는 시집을 출간했다.







◇ 소설 '김약국의 딸들' 주 무대 서피랑



김춘수 유품전시관에서 통영대교를 넘으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던 유치환(1908∼1967)의 청마거리를 만난다. 유치환이 젊은 시절 여류 시인 이영도에게 수백 통의 연서(戀書)를 썼던 통영중앙우체국과 '행복'이 새겨진 시비를 거쳐 100m 정도 걷다보면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의 호를 따라 지어진 초정거리와 마주친다. 통영의 명동으로 불렸던 항남 1번가, 오행당 골목 입구부터 보경유리상회까지 180m 구간에는 시인의 생가터와 표지석, '봉선화'가 새겨진 벽면과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 초정의 좌상 등을 만난다.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고 읊었던 시조시인은 15세 때 금융조합연합회 신문 공모에 동시 '제비'가 당선된 후 시조집 '초적' '목석의 노래' 등을 펴냈다. 일제강점기 수차례 투옥되기도 한 시조시인은 서예, 전각, 도자기, 서화에서도 일가를 이룬 예술가였다. 한국 시조를 한 단계 높인 초정은 부인이 사망하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슬퍼하다 닷새 후 부인을 따라가는 가슴 시린, 지독한 사랑으로 생을 마감했다.







초정거리에서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로 향하면 99계단과 피아노계단으로 각종 블로그와 SNS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서피랑(서쪽의 비탈) 입구에 닿는다. 박경리 어록을 길동무 삼아 계단을 오르다 보면 통영항의 풍광과 시원한 바람이 따라온다. 5옥타브까지 낼 수 있는 피아노계단과 수령 200년이 넘는 후박나무를 지나면 서피랑 꼭대기에 이른다. 조선 수군의 망루였던 서포루에서 바라본 통영항의 풍광은 눈으로 보기도 믿기 어려운 절경을 선사한다. 맞은편 동피랑도 한눈에 들어오는데, 충무공이 지휘한삼도수군통제영의 세병관을 기준으로 동쪽 벼랑을 동피랑, 서쪽 벼랑을 서피랑이라 부른다. 1950년대 통영항 주변 사진을 보며 현재 모습을 비교하는 색다른 즐거움도 있다.

서포루를 내려서면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서문고개가 나온다. 일명 '서문까꾸막'이라 속칭했는데 고개 초입에는 자필 원고본 그대로 새긴 표석이 세워져 있고, 골목 담벼락에는 박경리의 글귀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박경리 생가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현재 사람이 살고 있어 내부는 둘러 볼 수 없다. 박경리가 유년시절을 보낸 서문고개 주변에는 소설 속에 나오는 대밭골, 간창골, 명정샘, 하동집 등이 실제로 존재한다.







◇ 바다 바라보며 멍 때리기 좋은 남망산



망일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청마문학관은 청마 유치환의 인생을 연도별로 정리해 놓은 '청마의 생애', 시집과 산문집을 통해 시대별 작품 경향과 평가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청마의 작품세계', 유품과 청마관련 평론 서적ㆍ논문을 정리한 '청마의 발자취' 등 3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다. 어릴 적 통영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예술혼을 키운 청마의 발자취를 둘러보고 시를 감상할 수 있다. 문학관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면 태평동 생가를 이전 복원한 생가가 통영항을 바라보고 있다. 청마 생가는 안방, 부엌, 약방, 마루 등을 갖춘 본채와 사랑방, 광, 측간으로 이루어진 아래채 등으로 이루어졌다. 약방은 부친이 통영에서 한약방을 한 것을 보여준다.

통영항과 동호만을 가르며 길게 바다로 내민 남망산(72m)에는 김춘수의 시비 '꽃', 유치환의 시비 '깃발', 김상옥의 시비 '봉선화'가 세워져 있다. 세 시인이 뻔질나게 오르내리며 작품을 구상했던 남망산에서 바라다뵈는 해안 풍광은 '그림 같다'는 상투적인 수식을 절로 튀어나오게 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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