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님비 시설의 화려한 변신

입력 2017-11-10 08:01  

[연합이매진] 님비 시설의 화려한 변신

누구나 꺼리는 공간에서 끌리는 공간으로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내 뒷마당에는 안 된다'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혐오·기피 시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일컬어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라고 한다. 쓰레기소각장, 장례식장, 하수처리장, 핵폐기장이 님비의 표적이 되는 대표적 사례다.

도시화의 급진전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 도심 속에 들어앉은 모양새가 된 발전소나 공장 등도 님비 대상에 포함된다. 생활 속의 공해를 유발하거나 미관을 해치기 때문이다. 한때 흉물 취급을 당하던 우리 주변의 혐오·기피 시설들이 환골탈태에 성공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 석유탱크에 기름 빼고 문화 채우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경기장과 하늘공원 사이 매봉산 아래에는 40여 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일명 '석유비축기지'. 2000년 폐쇄되면서 쓸모를 잃고 방치됐던 이곳이 최근 친환경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1970년대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국내 경제가 큰 타격을 입자 정부는 상암동 매봉산 자락에 석유를 비축하기로 한다. 2년간의 공사 끝에 축구장 22개 크기인 14만㎡ 부지에 지름 15~38m, 높이 15m의 탱크 5개와 기타 부속시설이 들어섰다. 탱크 하나엔 가솔린을 담고, 나머지 두 개씩에는 경유와 등유를 보관했다.

보관 가능한 석유는 총 6천907만ℓ. 당시 서울 시민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일하는 직원 외에는 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1급 보안시설.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고 존재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직원들은 늘 긴장 상태였고 간첩 침투를 대비한 훈련과 화재 대비 소방 훈련도 수시로 진행됐다.

석유비축기지는 한일월드컵을 앞둔 2000년 11월 안전 문제로 폐쇄됐다. 바로 길 건너에 상암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서는 점을 고려했다. 비축된 석유는 경기도의 저장소로 옮겨졌고, 부지 일부는 월드컵 기간과 이후 임시주차장으로 사용됐다. 쓸모를 잃어버린 거대한 깡통들은 땅속에 묻혀 빨갛게 녹슬어 갔다.

낡고 녹슨 유산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서울시민들이었다. 2013년 일부 시민들이 석유비축탱크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토론회와 국제 현상 설계 공모가 진행됐다. 국제현상공모에서 수상한 작품명은 '땅으로부터 읽어 낸 시간'이었다. 설계에는 당연히 시민의 의견이 반영됐다. 마침내 2015년 말 '마포석유비축기지 재생 및 공원화 사업'이 본격 시작됐다. 목표는 친환경 문화복합공간으로의 재생이었다.





◇ 오랜 잠에서 깨어난 탱크들


사업 시작 약 2년 만인 지난 9월 석유비축기지의 새로운 모습이 공개됐다. 전체적인 모습은 그대로지만, 석유를 비축하던 곳에서 문화 전시장과 공연장으로 쓰임새가 바뀌었다. 문화가 가득한 곳이란 뜻에서 이름도 '문화비축기지'로 바뀌었다.

석유비축기지는 화력발전소에서 미술관으로 변신한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나, 가스공장에서 주거와 문화 복합시설로 거듭난 오스트리아 빈의 가소메터 시티처럼 방치된 산업유산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경우다.

문화비축기지는 가동 방법도 친환경적이다. 기지 내 모든 건물의 냉·난방에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신재생에너지인 지열을 이용한다. 30t 용량의 중수처리시설로 생활하수를 정화해 화장실 대소변기에 사용하고, 저류조에는 빗물 300t을 저장해 조경용수로 쓴다.

문화비축기지에는 원래 있던 탱크 5개 외에 탱크 1개가 새로 들어섰다. 기존 임시주차장에는 '문화마당'이란 문패가 걸렸다. 하늘에서 보면 문화마당을 중심으로 탱크들이 매봉산 아래에 부채꼴로 들어선 구조다. 기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문화마당 뒤편 언덕에 있는 'T6'(탱크 6). 초록빛의 얼룩덜룩한, 예전 육군 전투복 무늬의 직사각형 철판이 둥그런 외벽을 두른 건물이다.

이곳은 탱크 1·2를 해체하며 나온 철판을 외관에 재활용한 기지의 유일한 신축 탱크로 '커뮤니티 센터'로 이용된다.

T6는 국제회의나 강연, 문화 공연이 진행되는 다양한 공간을 갖추고 있고 카페테리아, 강의실, 회의실도 있다. 특히 1층에서 2층으로 연결되는 경사로는 공간이 아름다워 전시장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다.







◇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공간들



T6 뒤편으로 가장 왼쪽의 T1부터 맨 오른쪽의 T5까지 탱크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T1은 가솔린을 보관한 지름 25m, 높이 15m의 가장 작은 탱크였다. 입구에 들어서 회색빛 긴 터널을 지나면 투명한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둥그렇고 환한 공간이 나타난다. 탱크 해체 후 남겨진 콘크리트 옹벽을 이용해 유리 파빌리온을 만든 것이다. 유리 바깥으로는 암벽과 그 틈에서 자라난 초록색 풀이 고스란히 보인다. 전시, 공연 등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밤에는 별을 관찰할 수도 있다.

탱크를 둘러싼 콘크리트 옹벽이 고스란히 남은 T2에는 4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무대와 실내공연장이 들어섰다.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매봉산이 뒤편을 둥그렇게 두른 원형극장이 나타난다. 콘크리트 옹벽의 안쪽은 그대로 무대로 사용되고 관객석도 마련돼 있다. 지하에는 현대적인 실내공연장이 자리하고 있다.

T3는 석유비축기지 시절 유류 저장 탱크가 유일하게 원형대로 보존된 케이스다. 콘크리트 옹벽 한쪽의 출입구로 들어서면 붉게 녹이 슨 탱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직경 30.98m, 높이 15m의 탱크로 경유 약 1만5천ℓ를 보관하던 곳이다. 땅을 깊이 판 후 탱크를 앉혔기 때문에 바닥까지의 깊이가 상당하다. 옹벽 안쪽에는 초록색 이끼가 가득해 흘러간 시간을 가늠케 한다.







T4는 탱크 내부의 형태를 그대로 살린 공간이다. 내부에는 철재 기둥 21개가 있는데, 원래 있던 기둥을 그대로 뒀다. 유량을 재던 천장 구멍을 통해서는 햇빛이 은은하게 스며들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11월 11일까지 이곳에서는 조그만 소리도 크게 들리는 탱크의 특성을 살린 전시회인 '탱크 가득 리볼브'가 진행된다. 소리에 맞춰 조명 색깔이 변하고 스크린에는 관객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탱크 바깥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가면 옹벽의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는 오동나무, 석유의 양을 재던 유류 계측기 등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T5는 '이야기관'으로 불린다. 한 바퀴 돌면 1970년대 석유비축기지 시절부터 지금의 문화비축기지까지 그동안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한쪽에서는 매봉산 절단면이 그대로 드러난 사각 프레임을 찾아볼 수 있다.

임시주차장으로 쓰였던 공간은 '문화마당'이란 이름의 광장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은 시민이 참여하는 복합 콘텐츠 시장,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한 야시장, 축제장, 공연장 등으로 활용된다.

기지를 감싸고 있는 매봉산에 오르면 특별한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매봉산 전망대에서는 하늘공원과 월드컵경기장, 유유히 흐르는 한강, 그리고 멀리 남산타워 등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전체적으로 사람의 손처럼 보이는 문화비축기지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전망대는 T1이나 T5 바깥쪽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면 닿는다.

이광준 문화비축기지 기지장은 "T1의 유리 파빌리온, 자연암반이 좋은 음향을 만들어내는 T2의 야외무대, 공간 자체에 울림이 있는 T4 등 기존 구조물이나 건축물에 없는 공간이 방문객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한다"며 "열린 구조라는 공간의 특성을 살려 앞으로 시민들이 자유롭게 용도를 설정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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