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 오층석탑 금강경은 6세기 중반 유물…최고 인출본"

입력 2017-11-06 19:22   수정 2017-11-06 19:48

"왕궁리 오층석탑 금강경은 6세기 중반 유물…최고 인출본"

손환일 연구원 주장…"석탑 축조 시기는 나말여초로 봐야"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1965년 나온 은제도금금강경의 제작 시기를 6세기 중반으로 올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금까지 이 금강경이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제작됐다는 견해는 있었으나, 그보다 앞선 위덕왕(재위 554∼598) 시기의 유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처음 제기됐다.

6일 학계에 따르면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연구원은 논문을 통해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강경은 6세기에 만들어진 무령왕릉지석이나 왕흥사 사리감 명문과 필법이 비슷하고, 6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유행한 이체자가 쓰였다"며 "이 금강경은 550년을 전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 금강경은 가로 17.4㎝, 세로 14.8㎝, 두께 0.15㎝의 은제도금판 19장으로 구성됐다. 각각의 판은 경첩과 은사로 연결해 펴고 접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여러 군데 낡아 훼손된 경첩을 근거로 이 금강경이 석탑 봉안이 아니라 독송을 위해 만들어져 수십 년간 사용됐다고 강조했다.

손 연구원은 아울러 고증을 통해 금강경 제작 방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동판에 거꾸로 글씨를 쓰듯 새긴 뒤 은판을 대고 두드려 인출(印出)하고 도금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금강경을 동일한 방법으로 여러 점 만들었을 것"이라며 "최고의 목판 인출본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보다 150∼200년 이른 인출본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손 연구원은 이 금강경이 왕궁리 오층석탑에 봉안되기 전까지의 과정도 추적했다.

그는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제석사에 목탑을 지을 때 금강경을 먼저 넣었으나, 이 탑이 639년 불타면서 금강경과 사리기만 남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제석사 근처에 있는 왕궁리 유적에 현재의 석탑이 축조되기 전 목탑을 올려 금강경과 사리기를 봉안했고,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목탑 자리에 석탑이 축조되면서 다시 금강경이 이전됐다고 주장했다.

손 연구원은 "오층석탑은 9∼10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금동불이 나온 점으로 미뤄 10세기 초 이후의 나말여초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며 백제 석탑설은 부인했다.

그는 이 같은 연구 결과를 11일 열리는 한국고문서학회 월례발표회에서 공개한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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