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그들은 배가 고파 바다로 갔다…장생포 고래잡이

입력 2017-12-09 11:00  

[쉿! 우리동네] 그들은 배가 고파 바다로 갔다…장생포 고래잡이
과거 포경 전진기지…개도 지폐 물고 다닐 만큼 풍요 누려
지금은 불법 격세지감…포경금지 후 관광도시로 부활 노력

(울산=연합뉴스) 허광무 기자 = 오늘날 관광산업에서 '복고'는 유력한 콘텐츠 주제다.

젊은층에는 색다른 놀거리를 제공하고, 중장년층에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관광객을 모으기 때문이다. 개발의 시선이 비켜간 달동네와 마땅한 활용처가 없어 애물단지였던 폐철로가 사람 북적이는 명소가 되기도 한다.
울산에는 장생포가 대표적이다.
고래잡이 전진기지로 호황을 누리다가 포경금지 이후 급격히 쇠락했으며, 이후 다시 테마 관광지로 부활한 이 어촌 마을은 흥망의 드라마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장생포에는 '장생포 옛마을'이라는 관광시설이 있다. 1960∼1970년대 장생포 동네 풍경을 실물 그대로 복원한 곳이다. 시대물 드라마의 세트장처럼 정감 어린 풍경이 재현된 이 마을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장면이 있다.


◇ '강아지도 지폐를 물고 다닌' 부(富)의 도시
옛마을 입구에는 지폐를 입에 문 강아지 모양 조형물이 있다. 포경산업이 활황이던 시절, 돈이 넘친 장생포를 상징으로 포착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우체국, 사진관, 구멍가게, 방앗간 등이 옛 모습을 하고 관람객을 맞는다.
이어 고래해체장, 착유장, 포수의 집, 선장의 집 등 생경한 공간과 시설이 줄줄이 나온다. 바닥에 놓인 대형 고래의 배에 큰 칼을 꽂아 고기를 잘라내는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도 있다.
장생포 역사를 알고 보더라도 배에서 빨간 피를 쏟아내는 고래를 보는 일은 다소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장생포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라 해서 일각의 비판을 감수하고라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포수의 집에 들어서면 마도로스 복장의 노신사가 관광객을 맞는다.
그는 실제 포경선 선장과 포수로서 바다에서 대형 고래를 잡았던 추소식(76)씨다.
추씨는 장생포와 고래잡이의 역사를 설명하는 해설사로 근무 중이다.


◇ "당시 고래잡이는 범죄 아닌 유망산업"…막내 포수의 항변
추씨는 장생포 포경선 포수 중에서도 막내다. 그에게 일을 가르친 선배는 거의 세상을 떴다.
1958년 선원으로 포경선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0년부터 포경이 금지된 1985년까지 약 15년 동안 포수로 활약했다.
보통 선박의 리더는 선장이지만, 포경선은 예외다.
장생포 포경은 노르웨이식 포경법으로 분류된다. 속도가 빠른 배로 고래를 따라다니며 대형 작살이 발사되는 포경포로 고래를 잡는 방식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고래 흔적을 찾아 추적하고 작살을 명중시켜 고래를 잡는 포수가 포경선의 절대자가 된다.
포수의 능력은 단순히 고래에 작살을 맞추는 정도로 평가되지 않는다. 명포수는 복부에 작살을 명중시켜 고래를 즉사시킨다고 한다. 그래야 고래고기 선도가 좋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스포츠 스타가 거액을 받고 팀을 옮기듯, 능력 있는 포수는 선주에게 스카우트돼 회사를 옮겨 다녔다.
포수를 잘 만난 선원은 거액의 수당을 수시로 챙기고, 그렇지 못한 선원은 몇 달간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추씨는 포수로 일한 15년간 약 450마리 고래를 잡은 것으로 추산했다.
그가 활약한 시절에는 주로 밍크고래를 잡았다. 그 이전 포경선의 주요 사냥감이던 참고래가 남획으로 개체 수가 크게 줄어서다.
그러나 추씨도 1981년 6월 18m짜리 참고래를 포획한 적이 있다. 그가 기억하는 최고 대물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고래잡이 재개를 놓고 찬반 진영의 논리 충돌이 잦았지만, 이제 무게 추는 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현행법상 고래잡이는 분명한 불법일 뿐 아니라, '비인간 인격체'로까지 불리는 고래를 잡자는 발상은 야만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고래잡이로 청춘을 보낸 추씨는 감회가 어떨까.
그는 "당시에는 고래 보호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면서 "서양을 중심으로 고래잡이를 멈추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건 배부른 나라들이 하는 소리였고 배고픈 우리에게는 해당 안 되는 말이었다"고 기억했다.
추씨는 "이렇게 포경산업이 몰락할 줄도, 심지어 불법이 될 줄도 몰랐다"면서 "그 시절 고래잡이는 그저 매력 있는 산업이었다"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포수의 집안에 설치된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에서는 1972년 방영된 국내 유력 제약업체의 영양제 TV 광고가 반복해서 나온다.
'장생포 현지촬영'이라는 자막을 내건 광고는 바다를 누비는 역동적인 포경선, 활력 넘치는 선원 등의 이미지에 기대 제품을 선전했다.


◇ 울산과 장생포는 왜 고래의 도시인가
울산의 역사에서 고래잡이를 빼놓기 어렵다.
작살로 고래를 잡는 모습이 표현된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는 그 기원을 선사시대로 이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의 문헌에도 포경을 설명하거나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장생포에서 근대 포경이 시작된 것은 1899년 러시아가 포경회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동해에 고래 개체가 풍부한 데다 포경선이 접안하기에 수심이 알맞은 장생포는 포경기지로 최적지였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역시 장생포를 포경산업의 거점으로 삼았다.
일본강점기 포경선에서 한국인은 주로 하급 선원 역할을 했다. 다만, 이때 곁눈질로 포경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하급 선원임에도 벌이가 도시 숙련노동자보다 좋아 지원자가 많았다.
해방 이후 일본 포경회사가 철수하면서 장생포에는 소형 목선만 남았다.

1972년 100t급 철선이 포경선으로 활용되면서 포경산업도 규모가 커졌다.
당시 포경선은 고래를 잡았다는 표시로 뱃고동을 울렸는데, 소리가 저마다 달라 '누가 고래를 잡았구나'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포경선에 매달고 온 대형 고래를 육지로 인양해 해체하고, 온 마을 사람이 이를 구경하는 일이 하나의 의식이자 놀이였다.
일본강점기 때는 귀신고래(쇠고래)와 참고래 등 대형 고래가 한해 100마리 이상씩 잡혔다고 한다.
이후 귀신고래가 급감해 참고래가 주로 잡혔지만 이마저도 1970년대 들어 현저하게 줄었다.
참고래는 1982년 8월 고 이승길(포수)씨가 울산 근해에서 22m짜리 한 마리를 잡은 게 마지막이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크기가 작고 상품 가치가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밍크고래가 고래잡이 시대 막바지에 주 대상이 됐다.
우리나라가 1978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 가입함에 따라 1986년부터 고래잡이는 전면 금지됐다.
장생포 주민들은 우리나라가 서양에 굴복했다며 반발했다. 실제로 미국이 IWC 비회원국의 미국 수역 내 조업권 축소를 내걸며 압력을 행사했다.
1970년대 말 인구 1만여 명에 달한 장생포는 일자리를 잃은 주민의 이탈로 도시기능이 쇠퇴했다.
그러나 2005년 고래박물관 개관 이후 고래생태체험관, 고래바다여행선, 고래문화마을 등 관광 인프라가 잇따라 들어서면서 현재 장생포는 한해 70만∼80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hk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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