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을 아십니까

입력 2017-11-21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몽골의 슈바이처' 이태준을 아십니까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우리나라에서 공부하는 외국인 유학생 가운데 몽골 출신은 올 10월 현재 7천231명으로 중국(6만8천714명)과 베트남(2만4천548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몽골 인구가 300만 명에 불과한 것을 고려하면 인구비례로는 단연 1위다. 몽골 출신은 결혼이민자 가운데 7번째(2천380명)이고 국내 체류 외국인 순위로는 11위(4만2천754명)에 랭크돼 있다. 이 역시 인구로 따지면 첫손에 꼽힌다.


몽골인들이 이처럼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는 이유로는 지리적 인접성, 민족적 유사성, 한국의 경제성장, 한류의 영향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설렁거스'(무지개 나라)라고 부르며 동경하고 한국인에게 호감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몽골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전염병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워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린 독립운동가 이태준의 헌신적 노력도 여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이태준은 1883년 11월 23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몽골에서는 그를 '리다인'이라고 불렀는데 '다인'은 그의 호 '대암'(大岩)을 몽골어로 표기한 것이다. 그는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뒤 서울로 올라와 1907년 경성세브란스의학교(연세대 의대 전신)에 입학했고 1910년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1911년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일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600여 명을 검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을 일으키자 이듬해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난징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독립운동을 돕던 이태준은 몽골에 독립군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하려던 사촌 처남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로 건너가 고륜(울란바토르의 옛 이름)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이름의 병원을 차렸다. 그때까지 몽골인들은 라마교의 영향으로 병에 걸리면 기도와 주문에 의존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근대 의술을 펼친 이태준을 경의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실력은 금세 소문이 나 왕궁에 출입하며 왕족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몽골의 마지막 왕 보그드칸 8세의 어의가 됐다. 보그드칸은 1919년 7월 이태준에게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에르데닌 오치르)을 수여했다. 당시 몽골에 주둔하던 중국군 사령관 3명 가운데 하나인 가오쓰린의 주치의로도 활약했다.


1921년 11월 몽골을 방문한 여운형은 월간지 '중앙' 1936년 5월호에 '몽골사막여행기'를 기고하며 "몽골인들의 7, 8할이 감염됐던 화류병(성병) 절멸에 지대한 공헌을 함으로써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이태준을 향한 몽골인들의 존경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를 '신인'(神人)이나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고 한다.




동의의국은 몽골을 오가는 애국지사들의 연락사무소 겸 숙소로 쓰였고, 이태준은 김규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파견 비용을 대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한인사회당에 지원한 독립자금 40만 루블의 금괴 운송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 가운데 12만 루블이 고륜에 도착하자 1차분 8만 루블은 김립이 이태준의 도움을 얻어 상하이까지 무사히 운반했고, 2차분 4만 루블은 이태준이 직접 옮기려다가 러시아혁명 반대세력인 백위파 군대에 붙잡혀 살해되는 바람에 분실되고 말았다. 순국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다.



헝가리인 폭탄제조 전문가 마자르를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소개한 인물도 이태준이었다. 마자르는 1차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됐다가 몽골까지 흘러들어와 이태준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의열단이 사용하던 폭탄은 질이 좋지 않아 불발되거나 미리 터져 단원들의 목숨을 앗아가곤 했는데, 베이징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이태준은 마자르를 김원봉에게 소개하기로 했다. 이태준이 숨진 뒤에도 마자르는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김원봉을 찾아 나서고 폭탄을 만들어 경성까지 운반하는 데도 참여한다. 이 과정은 박태원이 쓴 논픽션 '약산과 의열단'에 감동적으로 그려졌으며, 지난해 개봉돼 인기를 모은 영화 '밀정'에서도 다뤄졌다. 관련자들은 마자르가 이태준의 애국정신에 감화돼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고 술회했다.





정부는 이태준에게 1980년 건국공로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재몽골한인회와 연세대 의대 동창회는 몽골 정부가 기증한 땅에 2000년 7월 가묘를 만들고 묘비를 세운 데 이어 이듬해 7월 이태준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여운형의 회고에 따르면 몽골 방문객의 단골 관광코스인 자이승전망대 옆 구릉(기념공원 근처)에 이태준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도로 건설 과정에서 사라져 찾지 못하고 있다. 2006년에는 기념공원 안에 몽골의 이동식 가옥인 게르 형태로 기념관을 꾸몄다가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 지원으로 목조건물로 신축해 2010년 재개관했다. 이태준의 출생지인 함안군도 이태준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차채용)와 함께 군북면에 '이태준 순국선열 기념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광복절 72주년 기념사에서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면서 독립운동가 5명 가운데 첫 번째로 '의열단원이며 몽골의 전염병을 근절시킨 의사 이태준 선생'을 거명했다. 이에 앞서 올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돼 전시회와 학술강연회 등이 펼쳐졌고, 4월에는 '제2회 연세 정신을 빛낸 인물'로 뽑혀 서울 연세대에서 부조 동판 제막식이 열리기도 했다. 울란바토르를 찾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태준 기념공원을 답사한 뒤에야 처음으로 이태준의 존재를 확인한다. 한국에도 그의 발자취를 기리는 곳이 늘어나 한국을 찾는 몽골인들이 들르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의 탄생 134주년을 맞아 이태준을 독립운동가로서만이 아니라 한-몽 우호의 상징으로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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