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백제를 사수하라! 산성의 도시 대전

입력 2017-12-16 11:00  

[쉿! 우리동네] 백제를 사수하라! 산성의 도시 대전
삼국시대 최고 전략적 요충지…확인된 곳만 48개소

(대전=연합뉴스) 한종구 기자 = 대전 대덕구 계족산은 황톳길 맨발 걷기로 유명하다.
지네가 많아서 닭을 풀어 잡아먹게 했다고 해서 계족산이라는 유래가 있지만, 원래 이름은 봉황산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가 한국 산 이름을 깔아뭉개기 위해 봉황을 닭으로 바꿨다고 하지만 근거는 박약하다.


이 황톳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대한민국 사적 355호이자 대전시기념물 제2호인 계족산성을 만난다.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한 계족산성은 산 정상에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석축 산성이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성벽. 군데군데 흘러내린 성돌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계족산성에 오르면 대전 시가지는 물론이고 대청호 너머로 충북 보은과 옥천까지 한눈에 조망한다. 왜 하고많은 곳 중에 이곳을 골라 산성을 쌓았는지를 짐작케 하는 광경이다.
대전에는 확인된 산상만 48개소에 달한다.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60개가 넘을 것이란 추정까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왜, 언제, 무엇 때문에 산 정상에 성을 쌓았을까.
많은 사람이 대전을 엑스포와 과학기술의 도시로 기억한다. 하지만 대전은 오래전부터 하늘길을 빼면 모든 교통수단이 거쳐 가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대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 남반부의 중심에 있다. 영남이나 호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핵심 지역이다.
반대로 서울을 장악한 세력이 남하하기 위해서 먼저 차지해야 할 곳이 바로 대전이다.
이런 교통과 군사 전략 측면에서 요충지인 대전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산성들이 축조됐다.
전문가들은 대전의 산성을 알기 위해서는 백제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 이전 대전은 '신흔국'이라 불리는 마한의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가 있는 곳으로 추정된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이 한반도 남쪽 마한지역을 백제로 흡수하고, 그때 신흔국도 백제에 통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대전은 삼국 중에서는 백제의 영토였지만 수도인 위례성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군대에 왕성을 빼앗기고 개로왕까지 목숨을 잃는 치욕을 겪으면서 백제는 서둘러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다.
웅진은 차령산맥 남쪽에 있어 북쪽의 고구려를 방어하기 좋고, 금강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금강 중상류에 위치해 신라에서 백제까지 뱃길로 하루면 당도할 수 있다는 점은 백제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의 대전지역에 방어시설을 구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 것이다.
새로운 수도 인근에 있는 대전이 수도를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교통로와 국경선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산성을 집중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백제 23대 동성왕(479~ 501)은 신라와 동맹을 체결했지만 신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전 동쪽 부근에 많은 성을 쌓아서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다.


다만 대전지역 산성이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양국의 긴장관계에 따라 산성이 늘어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다만 대전지역 산성이 군사적 목적에 따라 군마 이동통로를 감시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됐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산성의 위치가 고대 교통로와 일치한다는 설명이다.
고대인들은 식장산과 계족산 줄기에 산성 20여 개소를 쌓았고, 갑천변과 금강 주변에도 성과 보루를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대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인 계족산성은 조금 예외다.
계족산성을 놓고 수도 방어를 위해 백제가 쌓았다는 의견과 성의 축조 방식으로 볼 때 신라가 만들었다는 견해가 분분했으나 현재까지 고고학 발굴성과에 의하면 신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출토된 토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 6세기 중반 신라 토기이고, 이후에 나온 토기 형태도 신라 토기가 많아 한때 백제가 점령한 땅이었지만, 신라가 만든 산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산성은 대부분 백제시대의 유산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제는 대전 동쪽 산마다 수십 개 산성을 쌓으며 신라를 견제했지만,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결국 멸망하게 된다.
하지만 3년 동안 백제 땅 곳곳에서는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대전은 이때 백제 부흥군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신라에서 웅진으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을 백제 부흥군은 거점으로 삼았고, 이에 신라군은 안전하게 물자와 병력을 조달하기 위해 이곳을 차지해야 했다.
산성에서의 조망은 쳐들어오는 적을 쉽게 방어할 수 있다는 이점과 주변 산성과의 연계도 원활하다는 장점도 있다. 산성에 접근하는 적들에게 그 자체로 위협의 대상이 됐다.
이후 대전의 산성 가운데 일부는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사용됐다. 이 가운데 계족산성은 대전지역 60여 개 산성 가운데 가장 크며, 조선시대에는 봉수대가 설치돼 운영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대전과 함께 자리를 지키는 산성은 지금은 비록 낡고 허물어져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지역을 지키고 나라를 지켰던 의미는 그대로다.
사람은 산성을 잊었지만, 산성은 지난 1천500년 동안 말없이 대전을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대전에서는 특히 '산성을 알자'는 취지로 산성축제, 산성 지킴이 활동 등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다소 시들어진 느낌이다.
다만 대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을 연결한 '대전 둘레산길'은 여전히 시민의 사랑을 받으며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안여종 대전문화유산 울림 대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라는 지형적 요인과 함께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에 있다는 점 등이 대전을 산성의 도시로 만들었을 것"이라며 "대전의 산성을 공부하다 보면 삼국시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jkh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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