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섭 강원대 교수의 '명재고택' 열화당서 출간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의 명재고택은 여러 면에서 전국 고택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리학자 윤증(1629~1714)의 아들인 윤행교, 손자 윤동원이 집을 지었다.
명재고택은 독특한 점이 많다. 여느 한옥과 달리 담도 대문도 없다. 신간 '명재고택'(열화당 펴냄)의 저자인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풍수지리 못지않게 핵심적인 배경을 당대 정치사에서 찾는다.
윤증은 집권세력이던 송시열의 노론과 첨예하게 맞섰던 소론의 우두머리였다. 당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노성 윤씨 가문의 동태와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노론의 감시에 (담과 대문으로) 숨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채를 과감하게 개방하는 적극적인 대응을 선택했다. 사랑채를 과감하게 열어놓은 것은 당당함과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배타성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개방성을 나타낸 것이다."
차 교수는 명재고택이 몇 년에 지어졌는지, 윤증이 언제 얼마나 거주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도 이와 연결짓는다. 윤증이 어떠한 분란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자 문제가 될만한 문서는 없애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와 더불어 "큰 가옥만이 있고 실학이 없는 것이 가장 큰 폐단"이라고 말할 정도로 근검을 미덕으로 삼았던 윤증이 애초 건축 자체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명재고택을 원래 '古宅'이라 하지 않고 '故宅'으로 표기했던 것도, 윤증이 실제로 거주하지 않고 유봉정사에 머물면서 왕래만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명재고택을 5년여간 30차례 드나든 끝에 책을 완성한 차 교수는 이 집을 '지행합일을 실천한 백의정승의 집'으로 규정한다.
윤증은 소론의 거두였지만, 혼란스러웠던 조정을 멀리했다. 단 한 차례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채 외증조부 성혼에서 아버지 윤선거로 이어지는 전통을 계승하며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책은 예학을 이론으로만 논하지 않고 삶에서도 성실하게 실천했던 윤증의 자취를 뒤쫓는다. 명재고택에도 실용과 실질을 추구했던 윤증의 사상이 반영돼 있다.
1부 '노성 파평윤씨의 역사'에서는 노성에 정착한 지 백여 년 만에 호서 삼대 명문가에 들 정도로 부상한 노성 윤씨가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2부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16:9의 사랑채 누마루 창문 비율에서도 확인되는 실용과 과학의 상징 등 공간을 구석구석 관찰한 내용이 담겨 있다.
3부 '무실과 실심의 사상과 문화'에서는 노성 윤씨의 학문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종가의 음식 문화도 소개한다. 이이와 성혼의 사상을 이어받은 윤증의 무실학풍은 실심, 진실된 마음이 기본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책은 역사서뿐 아니라 종손 윤완식 씨를 비롯해 생존한 문중 어른들 인터뷰, 집안이 소장한 문집과 문서 등 수많은 기록물을 바탕으로 했다. 124점의 색도판도 함께 실렸다.
264쪽. 2만8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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