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살기엔 '척박한 땅'…황태 만들기엔 '최적'

입력 2018-01-27 11:00  

[쉿! 우리동네] 살기엔 '척박한 땅'…황태 만들기엔 '최적'
전국 황태 80% 생산 인제 용대리…실향민 '노랑태' 건조가 효시
"황태 맛은 하늘이 내린다"…눈·바람·추위 삼박자에 금빛 변신



(인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눈·바람·추위를 견디며 겨우내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진정한 황태로 거듭납니다. 그래야 속풀이 상에 오를 자격이 주어지죠."
강추위가 몰아친 지난 23일,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황태덕장은 명태를 덕장에 내거는 막바지 상덕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미 덕장에 내걸린 황태는 밤사이 내린 흰 눈을 이불 삼아 덮었다. 새벽녘 몰아친 북서풍은 눈 이불을 파고들어 황태를 꽁꽁 얼렸다.
내설악 용대리 골짜기를 휘감아 몰아치는 칼바람은 살을 예리하게 도려내는 고통만큼이나 아리다.
덕장에 일렬로 늘어선 황태는 아가리만 쩍 벌린 채 아무 말이 없다. 겨울 산골의 아침 햇살이 떠오르자 그제야 늦잠을 자다 깬 듯 몸을 흔들어 눈 이불을 벗어 던지며 은빛을 발산한다.
이강열(58) 용대황태영농조합법인 대표는 "12월부터 시작된 상덕 작업이 90%가량 진행됐다"며 "겨우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야 속이 황금빛을 띤 최상품 황태가 된다"고 말했다.
눈·바람·추위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노르스름한 황금빛 황태가 탄생한다.
바람과 날씨,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지 않고서는 금빛 변신은 불가능하다.
명태가 여러 이름으로 불리듯 황태도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다. 바람이 너무 들어 썩어 문드러진 '찐태', 기온이 너무 낮아 껍질이 꽁꽁 얼어버린 '백태', 속이 거무스름하게 변한 '먹태', 땅에 떨어진 '낙태', 몸통에 흠집이 생기면 부르는 '파태'가 있다.
황태 맛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말은 이에서 비롯됐다. 황태는 겨우내 눈과 바람, 추위를 견디며 금빛 변신을 꿈꾼다.


◇ 황태 10마리 중 8마리가 용대리 출신…1963년 황태·용대리 첫 만남
전국 황태의 80%가 인제 용대리(龍垈里)에서 생산된다. 우리가 숙취 후 찾곤 하는 속풀이 황태해장국 대부분이 이곳 출신인 셈이다.
인제읍과 원통을 거쳐 한계삼거리에서 미시령 방면으로 차로 30여 분을 내달리면 내설악 중심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이 나타난다. 바로 용대리다.
이곳 북쪽 길 양쪽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가 '용바위'다. 용바위 아랫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용의터' 또는 '용대동(龍垈洞)'이라고 불린 것이 용대리 뿌리가 됐다. 바람이 많아 풍대리라고도 불렸다.
용대리 황태에는 어떤 역사가 서려 있을까. 황태 건조법은 함경남도 원산의 '노랑태' 생산에서 비롯됐다.
6·25 전쟁 이후 함경도 피난민들은 휴전선 부근인 속초 등지에서 모여 살면서 실향민의 터전을 일궜다.
실향민들은 함경도 지방과 기후가 흡사한 진부령과 대관령 일대에 덕장을 설치하고 명태를 말렸다.
그러나 원산에서 맛보던 누르스름한 노랑태를 먹을 수가 없었다. 안개가 잦아 햇빛을 덜 받은 탓에 거무스름한 먹태가 됐다.
이들이 황태 생산에 적합한 기후를 찾아낸 곳이 내설악에 자리한 용대리였다.
명태는 덕장에 내거는 순간 얼어야만 육질의 양분과 맛이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겨울 용대리는 밤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고 내설악 계곡에서 바람이 불어 황태 건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용대3리에 황태덕장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1963년. 용대리와 황태의 첫 만남인 셈이다.
혹독한 기후 탓에 농업이 부진한 용대리는 황태 건조장으로 빠르게 탈바꿈했다.
그러나 농업과 겸업이 지속하면서 황태 건조와 가공업 중심지로 완전히 재편된 것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황태 마을로 용대리가 전국 황태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의 면모를 갖춘 것은 30여년 전인 1985년 이후의 일이다.
황태 생산량의 나머지 20%는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등지가 맡는다. 대관령 황태덕장은 용대리보다 10년 늦은 197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이 열리는 횡계리 올림픽프라자 터도 원래 황태덕장이었다.


◇ 사람에겐 혹독한 기후…황태엔 천혜의 조건
용대리가 국내 황태 산업의 중심지가 된 것은 천혜의 지리적 조건과 혹한의 기후를 갖췄기 때문이다.
용대리는 동해의 명태어장과도 가깝다. 동해에서 잡은 명태를 배를 갈라 냉동하는 할복장도 미시령과 진부령 넘어 속초와 고성에 있다. 할복장을 오가는 물류비용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동해에서 명태가 거의 사라졌지만, 지금도 러시아산 명태를 잡아 속초와 고성에서 할복한다.
해발 1천m 이상 준봉이 에워싼 용대리는 겨울철 황태 건조기간 최저기온이 영하 18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이 많다. 한겨울 혹한기에는 영하 25도까지 떨어진다.
특히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부는 북풍은 마을 좌우의 매바위와 용바위 협곡을 지나면서 2∼3도가량 기온을 더 떨어뜨려 황태 건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한겨울 12∼1월에는 차가운 북서 계절풍이 태백산맥 준령을 넘으며 일으키는 푄현상(동해안→내륙) 영향으로 내륙 용대리 지역은 눈이 많이 내린다.
봄이 되면 푄현상이 반대방향(내륙→동해안)으로 불어 건조 단열 압축된 바람이 명태 건조에 최적이다.
용대리 황태덕장은 용바위와 매바위 협곡을 지나는 북천을 따라 3㎞에 걸친 밭이나 개활지에 형성됐다.
이상기후에 따른 기온 상승과 명태 세척으로 발생한 수질 오염 문제로 북천변 저지대에 있던 황태덕장은 계곡 일대로 자리를 옮겨 지금의 황태덕장을 이뤘다.
사람이 살기에는 척박한 땅이지만 황태 건조·생산에는 최적 입지였던 셈이다.


◇ 연 매출 505억원 부촌…서울양양고속도로 개통으로 위기
2017년 기준으로 용대리 황태덕장 총면적은 축구장 24개에 해당하는 17만㎡에 이른다.
9천∼1만2천㎡ 규모의 황태덕장 20여 곳이 자리를 잡아 주민 80%가 황태 생산을 생업으로 한다.
2014년엔 '용대황태산업특구'로 지정되면서 각종 규제도 완화됐다.
특구 지정으로 용대리 일원 132만4천167㎡(1천635필지)에 100억원 사업비가 투입됐다.
용대리 황태 생산제조업체는 44곳이다. 인제군 전체 제조업체 143곳의 30.8%를 차지한다. 대부분 3인 미만인 소규모 가족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305명 종사자가 연간 3천15만 마리 황태를 생산해 505억원 매출을 올린다.
44개 업체 연평균 수입은 11억4천700만원. 이 가운데 황태덕장을 비롯해 판매장,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업체는 연간 3∼4억원 이상 고수익을 올린다.
1999년부터는 특산물 황태를 홍보하고 주민 화합도 다지기 위한 황태 축제를 연다.
겨우내 건조된 황태가 상품화하는 시기에 맞춰 매년 5월 열리는 축제에는 황태 장터, 황태 요리체험, 시식과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축제 기간 10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등 농가소득에 크게 이바지한다.
눈과 추위, 바람만 있던 척박한 용대리 주민들은 황태 산업으로 부촌이 된 것이다.
그런 용대리 황태 산업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지난해 6월 30일 서울∼양양고속도로 동홍천 구간이 개통하면서 용대리를 지나던 44번 국도는 교통량이 급감했다.
평소 3시간 걸리던 서울∼양양 이동시간은 고속도로 개통으로 1시간 40분으로 확 단축됐다.
이로 인해 기존 44번 국도를 통해 용대리를 지나 속초·양양으로 향하는 차량 통행량이 70∼80%가량 줄었다.
용대리 황태 마을을 관광객도 70%가량 줄어 황태 산업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강원도와 인제군이 부랴부랴 인제군 전체에 3천603억원 규모의 지원방안을 내놨지만, 황태 마을에 미치는 직접적인 효과는 미지수다.
황태마을 주민들은 지난해 도시형 소공인집적지구 지정 신청 등으로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고 나섰다.
자구책 핵심은 황태덕장 현대화, 용대리 매바위 활성화를 위한 모노레일 설치, 황태 상품 개발로 요약된다.
최용진(52) 인제용대황태연합회 사무국장은 "용대리 황태산업과 관광을 접목한 황태 테마 관광지 조성에 모든 역량을 모으고 있다"며 "'위기는 곧 기회'라는 생각으로 용대리와 황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jle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