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우리동네] 백두대간 첫 고갯길 쉼터 충주 미륵원

입력 2018-02-17 11:00  

[쉿! 우리동네] 백두대간 첫 고갯길 쉼터 충주 미륵원
신라 아달라왕 때 계립령으로 개통…고려 때까지 번성

(충주=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 "3년(156년) 여름 3월, 서리가 내렸다. (같은 달에) 계립령(鷄立嶺) 길을 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아달라왕(재위 154~184년) 때 있었다고 기록한 한 구절이다. 이에 해당하는 원문을 보면 '개계립령로(開鷄立嶺路)'이니, 없던 길을 뚫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때 개착이 요즘의 터널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 험준한 고갯길을 비로소 개통했다는 말이다.
현대의 고속도로 개통과는 다르지만 그 의미는 경부고속도로 개통에 맞먹는 대사건이었다. 신라가 험준한 소백산맥에 막힌 한반도 중부로 통하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계립령 길이란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지금은 하늘재라 불린다. 오죽 그 길이 험준했으면 이렇게 부르겠는가.
나아가 계립령 길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우리 땅에서 처음 생긴 백두대간 고갯길이란 점에서도 아주 큰 의의가 있다.
그런 까닭에 계립령은 군사적 요충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백산맥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던 상인이나 관리들이 이용하던 길이었다.
쉽게 말해 현재의 고속도로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고속도로에는 군데군데 휴게소가 있기 마련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을 잇는 고갯마루엔 추풍령휴게소가 있고,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이전 영동고속도로에는 대관령 휴게소가 있다.
마찬가지로 계립령 길에도 휴게소가 있었다. 길손들이 쉬어가는 휴게소 역할을 한 호텔이자 사찰, 바로 미륵대원(彌勒大院)이다.

◇ 미륵이 보호하는 휴게소
미륵이란 미래불이다. 현세의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하고 난 뒤 5억6천만 년 뒤에 온다는 구원의 부처다. 석가모니는 그가 다음 보위를 이을 미래 부처임을 수기(예언)했다. 그런 까닭에 미륵보살, 혹은 미륵부처에 대한 불교신앙은 언제나 흥성했다. 구원의 부처이자 보살이니 산적이나 호랑이를 만날지도 모르는 고갯길 나그네들한테는 수호신이었다.
미륵대원은 당시 고갯길을 넘던 사람들의 애환과 아픔을 구원하고 보듬어준 삶의 안식처이자 휴게소였다. 미륵이라는 말로 보아 사찰이기도 했지만, 큰 집이라는 대원(大院)을 붙였으니, 숙박시설이기도 했다. 불교가 억압됐다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사찰은 휴게소를 겸한 데가 많았으니, 영남대로상에 위치하는 양산 통도사는 조선통신사가 자주 이용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쓴 '충북의 고개문화'에 따르면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16세기 충북에만 해도 약 100개에 달하는 원(院)이 있었다.
발굴결과 회(回)자형 구조인 미륵대원에는 가운데에 말을 묶어 둔 마방(馬房)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시대 말은 곧 지금의 자동차였으니 그 성격을 알 만하다. 주변에서 터가 확인된 각종 건물은 여행객 숙소나 관리인이 기거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임대경 충주시 학예연구사는 "미륵대원 인근에는 민간이나 혹은 국가 차원에서 사찰을 관리하는 시설이 있어 고개를 넘어가는 손님들에게 숙식을 제공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또 하나의 석굴암
미륵대원 주변에는 석굴암과 비견될 정도로 장대한 미륵대불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석조 여래입상(보물 제96호)이다.
높이 10.6m에 달하는 화강암 5개로 쌓아올린 돌부처를 마주하면 그 위풍당당함에 압도된다.
석조 여래입상은 돌로 석실을 만들고 그 위를 목조지붕으로 덮은 형식의 석굴이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볼 수 있는 자연암반 기반의 석굴이 아닌 평지에 석축을 쌓고 흙으로 메운 축조석굴이다. 지금은 지붕이 날아가는 바람에 그런 면모를 제대로 맛보긴 힘들지만, 이곳을 제2의 석굴암으로 일컫는 이유다.
석불은 둥근 얼굴에 활모양 눈썹과 넓적한 코 등 석조 여래입상의 표정이나 엉성한 옷 주름 표현, 원통형 몸체 등은 고려 초기 충청지방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보호석실 해체 보수 작업이 한창이라 가까이서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눈으로 보지는 못한다.
1977년 발굴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미륵대원은 최근 석굴 주실 서측 부분이 침하하는 현상을 보여 2014년 7월부터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충주시 관계자는 "올해 말 보수공사를 마무리할 예정이지만 신중하게 작업을 해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며 "지금은 석실 주변으로 구조물이 둘러쳐져 있어 창을 통해서만 내부를 볼 수 있다"고 전했다.

◇ 미륵대원을 지키는 사찰의 상징들
석조 여래입상 바로 앞에는 높이 6m인 오층석탑(보물 제95호)과 팔각 석등(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이 천년 세월을 버티며 꿋꿋이 서 있어 미륵대원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오층탑은 일반적인 탑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자연석으로 된 탑의 맨 아래 기단부에서부터 몸통인 탑신부를 거쳐 꼭대기인 상륜부까지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둔중하다.


이에 반해 팔각 석등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차분하게 한다.
전형적인 팔각 석등으로 통일신라 양식의 석등이다. 사각형 지대석과 연화 대석은 자연석으로 만들어졌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얹어놔 아름다움을 뽐낸다.


팔각 석등과 오층석탑 바로 인근에는 자연암반 위에 지름 1m쯤 되는 둥근 바위가 올려져 있다. 바위가 거북처럼 생겼다고 해서 거북바위로도 일컫는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시절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온달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주변에 힘자랑하기 위해 이 둥근 바위를 들어 올리곤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온달 장군 공깃돌이라고도 불린다.


◇ 문경새재에 밀려난 계립령
사찰·휴게소 기능을 겸하며 고려 시대까지 고개를 넘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미륵대원은 조선시대부터 점차 활기를 잃었다.
조선 초기부터 조령이 공식 교통로가 됐기 때문이다. 조령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와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를 잇는 고갯길로 새재라고도 한다. 경상도의 세곡 수송로이자 서울과 동래(지금의 부산)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일부이기도 했다.
험준한 산세를 지녀 왜적이 쳐들어오면 계립령보다 군사적으로 방어하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조령의 시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강점기에는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 문경시 문경읍 각서리를 잇는 고개인 이화령이 중심 통로가 됐다.
1925년 일제가 이 고개에 신작로를 개설하고 경북 북부와 서울을 연결하는 3번 국도가 되면서 기존 조령보다 통행량이 급증하고 중요성도 커졌다.
1998년에는 3번 국도가 확장하고 이화령 터널이 생기면서 이화령 옛 고갯길은 차량이 거의 통행하지 않게 됐다. 2004년에는 터널 구간으로 이화령 남쪽을 통과하는 중부내륙고속국도가 개통됐다.
교통로 문화사가인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은 "시대별로 그 당시 집권세력이 필요했던 군사·지리적 요구에 따라 국가의 중요한 육상통로도 달라지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각각의 고갯길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교통의 중심축이자 주변에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 곳"이라고 평가했다.
옛날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이 일대가 다시 살아날 움직임을 보인다. 일반에는 아직 생소한 미륵대원이 뛰어난 문화유산 현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는가 하면, 옛날 고갯길을 따라가는 등산 애호가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vodcast@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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