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한 달] 문화예술계 추악 까발려져…정화 기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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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02-28 06:00   수정 2018-02-28 07:35

[미투 한 달] 문화예술계 추악 까발려져…정화 기회 될까

[미투 한 달] 문화예술계 추악 까발려져…정화 기회 될까
오래 묵인된 권력자들 횡포…피해자들 용기로 폭로돼
'위드유' 등 지지·연대 강화…피해자 보호·지원책 마련 촉구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문화예술계는 성폭력 고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의 중심에서 격랑을 맞은 상황이다.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을 필두로 문단과 연극·공연계, 영화계, 미술계 등 전방위에서 충격적인 사건들이 한꺼번에 까발려졌다.
문화예술계는 우리 사회의 다른 조직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구조가 가려져 있는 데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위계와 서열 속에 권력자들이 오랫동안 군림하며 횡포를 휘둘러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이를 위선으로 가려온 남성·주류 집단은 이번 '미투'의 격랑을 맞아 패닉에 빠졌지만, 대중은 용기를 낸 고발자들에게 박수와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번 기회에 문화예술계가 구악에서 벗어나 투명하고 깨끗하게 거듭나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크다.
또 약자인 여성들이 두려움 없이 피해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는 위험한 방식이 아니라 피해자 신상을 보호해줄 공공의 신고 창구가 마련돼야 하며,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죄가 성립되는 현행법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 문화예술계, 끊이지 않는 성폭력 폭로…왜? = 지난달 29일 서지현 검사의 미투 폭로 이후 불씨는 곧바로 문화예술계로 번졌다.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겨울 한 계간지에 기고한 시 '괴물'이 불을 당겼다. 이 시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 이후 SNS 상에서 퍼지다가 이달 6일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최 시인은 '괴물'로 묘사된 인물을 'En선생', '노털상 후보' 등으로 표현해 문단에서 술자리 성추행을 상습적으로 벌인 원로 시인이 고은임을 시사했다. 최 시인은 직접 TV 뉴스에 출연해 문단에서 벌어진 소위 권력자들의 상습적인 성희롱, 성추행 등 행태를 폭로하면서 문단 권력의 횡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후 불씨는 다시 연극계로 번졌다. 이달 14일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처음으로 연극계 거물인 이윤택 연출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이후 이 연출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이어지고 급기야 성폭행 주장까지 나오며 봇물 터지듯 폭로가 확산했다.
뒤이어 연극계 거장이자 원로 연출가로 대우받아온 오태석, 유명 연출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였던 김석만, 연극배우 출신으로 대학 강단에 선 조민기, 극단과 극장을 운영한 조재현, 중견 배우 한명구와 최일화, 뮤지컬계 거장으로 꼽히는 윤호진, 유명 사진가 배병우, 시사만화가 박재동까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됐다.
이렇게 문화예술계 성폭력이 그동안 쌓이고 쌓여온 것은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고 예술계에서는 별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오랫동안 묵인돼 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학계에서는 등단, 출판, 문학상 등에 영향력을 끼치는 이들이, 연극·공연계에서는 무대에 설 기회를 주고 연습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대학교에서는 논문 심사나 학점 등을 빌미로 힘을 지닌 남성들이 약자인 젊은 여성들을 괴롭혔다고 피해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세계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이들 앞에서 그들의 눈밖에 나면 그 바닥을 아예 떠나야 하는 처지의 여성들은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거나 말한 경우에도 주변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권력관계가 우리 사회에서 비단 문화예술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만큼, 성폭력 문제를 이 분야에서만 유독 심각한 현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도 많다. 그나마 이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여성들이 미투에 앞장서고, 종속 관계가 여타 사회 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에 피해 여성들이 좀더 용기를 내 폭로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 '위드유' 등 지지·연대, 대안 마련 움직임 활발 = 피해자를 지지·응원하며 연대의 뜻을 나타내는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 하겠다)' 선언과 함께 젊고 건강한 문화예술인들이 대안을 만들어가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고 있다. 관객들, 문화예술 수용자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고 나섰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관계자들뿐 아니라 팬들까지 '위드유' 해시태그(#)를 달거나 '위드유'를 적어넣은 팔이나 손 사진을 올리는 식으로 용기를 낸 피해자들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SNS를 통해 확산시키고 있다.
연극·뮤지컬 관객 300여명은 지난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앞에서 '연극뮤지컬관객 #위드유(WITH_YOU)'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 집회는 일반 관객 3명이 트위터를 통해 추진하기 시작해 집회 비용도 자발적인 모금으로 마련하는 등 관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뤄졌다.
연극인들이 결성한 '성폭력 반대 연극인 행동'은 권위주의 문화와 위계에 의한 폭력,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 등 폐단의 고리를 끊어내겠다며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상담 창구를 마련, 법률 자문 등을 돕겠다고 나섰다.



국립극단은 앞으로 성폭력·인권침해를 막기 위한 제도 보완책으로 협업 배우와 스태프를 대상으로 한 성폭력 관련 지침을 마련하는 한편,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 신고·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김광보 서울시극단 예술감독은 최근 신작 제작발표회에서 "(이번 일로) 연극의 민낯이 까발려졌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한국 연극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리셋(reset)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이 상임고문으로 있던 국내 문인들의 대표 단체 한국작가회의도 이번 사태의 후속 조치로 '윤리위원회'를 별도로 두고 성폭력 등에 대한 신속한 징계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성폭력피해자보호대책팀'(가칭)을 상설 기구로 둬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주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27일 국회 업무보고에서 성폭력과 관련한 집중 민원이 예상되는 예술 분야에 전담 신고상담센터를 설치하는 방안 등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예방대책'을 발표했다.

◇ '미투'로 정화되려면 피해자 보호책 마련, 제도 정비돼야 = 미투 운동이 폭로 내용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분위기 속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특히 일부 미디어가 자극적인 피해 내용을 전달하는 데 치중하고, 대중의 관음증이 이를 따라가면서 정작 중요한 미투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지적이다. 또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일부 남성들은 미투 폭로자들의 신상을 털어 2차 가해까지 가하는 경우도 벌어진다. 피해자들이 가해자들로부터 명예훼손 민·형사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보호 장치가 딱히 없다는 점도 문제다.



최근 잇따라 열린 미투 관련 토론회에서는 정부 기관의 철저한 진상 조사와 향후 성폭력 방지 제도 정비, 피해자 보호책 마련 등이 촉구됐다.
신희주 영화감독은 "집단적 묵인과 방조, 협력이 연쇄적 성범죄를 가능하게 했으므로 수사기관과 별개로 철저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며 "조사결과를 기반으로 정책과 제도의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를 모델로 삼아 문화체육관광부에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문화예술계 전반의 성폭력 사건을 심층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특수한 피해자의 문제로 축소해 사생활을 캐고 신상털이를 하며 인격권을 무참히 짓밟는 행동은 성차별의 구조적 원인을 심화시킨다"며 "적반하장식 책임전가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가장 오래된 적폐가 성차별적 구조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고 분석했다.
김명숙 한국여성노동자회 노동정책국장은 "직장 내 성희롱 사실을 문제제기하면 명예훼손이 피해자를 협박하고 사건을 무마하는 데 악용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는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된 형법 307조는 그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선경 변호사는 "미투 이후에 발생할지 모르는 명예훼손 피소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며 미투 운동에 합류할 때 법적 다툼에 대비한 전략을 미리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여성단체에서는 미투 운동에 수반되는 법률 지원을 정부가 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min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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