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전주 경기전

입력 2018-04-11 08:01  

[연합이매진] 전주 경기전
조선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

(전주=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전주(全州)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本鄕)이다. 그래서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한다. 풍패는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 데서 유래했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 때 사공(司空·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한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고,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떠날 때까지 태조의 선조들은 전주에서 살았다.



요즘 전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700여 채의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마을이다. 전주한옥마을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3차례 연속 뽑혔고, 2016년에는 세계적인 여행 정보지 '론리 플래닛'이 선정한 '1년 안에 가봐야 할 아시아 10대 명소' 중 3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 명성에 걸맞게 한옥마을은 한복을 차려입고 마을 골목골목을 누비며 카메라와 휴대전화로 인증샷을 남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한옥마을 중심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왕의 초상)을 모신 경기전이 있다.
조선은 건국 후 한양을 비롯해 전주·영흥·경주·평양·개경 등 여섯 곳에 태조 어진을 봉안했다. 경기전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다. 태종 10년(1410) 지어진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됐다.



◇ 태조 어진 모신 곳…'말에서 내릴지어다!'

현재의 경기전 정문(매표소)은 본래 없던 것으로 1980년대 세운 것이고, 정문 앞에는 본래 홍살문 옆에 있었던 하마비(下馬碑·전북 유형문화재 제222호)가 옮겨져 있다. 표석에는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기에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무나 출입하지 말라는 '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이 새겨져 있다. 광해군 6년에 세운 하마비는 일반 하마비와 다르게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암수 한 쌍이 받치고 있는 독특한 형태다.
정문을 지나면 이곳이 성역임을 표하는 홍살문(紅箭門)과 경기전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외신문, 정전으로 들어가는 내신문,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正殿·보물 제1578호)이 일직선상에 있다.



높게 돋우어 쌓은 석축 위의 정전은 남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多包系) 형식의 맞배집 건물이며, 그 앞으로 돌출된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좌우로 익랑(翼廊)이 각 2칸, 동서로 월랑(月廊)이 각 4칸 배치돼 있다. 정전 뜰 중앙에 어진이 다니는 신도(神道)가 있고 양쪽으로는 제관들이 다니는 참도(參道)가 있다. 신도 양옆으로 물을 길어 담아 놓는 드무(豆毛)를 3개씩, 6개를 두어 방화에 대비했다. 겨울에는 물이 얼지 않도록 소금을 넣었다. 화재막이용 거북이 암수 한 쌍이 정자각 정면의 붉은색 널빤지 지붕에 위아래로 붙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정전 중앙의 감실에는 푸른 곤룡포에 임금만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을 쓴 태조가 정면을 바라보고 용상에 앉아 있다. 경기전에 처음 모셔진 낡은 어진은 고종 9년(1872)에 물에 씻어서 백자 항아리에 담아 정전 북쪽에 묻었다. 그 대신 박기준·조중목·백은배 등 8인의 화사가 모사한 어진을 경기전에 다시 봉안했다. 현재 정전의 어진은 권오창 화백이 1999년 모사한 것으로 고종 때 모사한 태조 어진(국보 제317호)은 어진박물관 수장고에 옮겨져 있다.



태조 어진 뒤에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고, 보개(寶蓋)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정전 좌우편으로는 용선(龍扇)·봉선(鳳扇)·청개(靑蓋)·봉선(鳳扇)·홍개(紅蓋) 등 의장물을 두고, 정전 안 정문 좌우에 태조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雲劒) 한 쌍을 세워 두었다.

◇ 조선왕조실록 보관하던 전주사고

정전의 내신문을 나와 동편의 문을 지나면 마치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하늘로 오르다가 다시 땅을 치고 솟구치는 형상의 매화나무와 울창한 대나무숲이 눈길을 끈다. 경기전에는 매화나무·회화나무·배롱나무·대나무·단풍나무·느티나무·은행나무·팽나무 등 아름드리나무들이 많다. 특히 대나무숲은 사진 애호가와 전주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인증샷 명소다.
경기전 동편 구역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국가 중요서적을 보관하던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자리하고 있다.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그 분량이 1천893권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다. 임진왜란 직전 전주사고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문헌 총 1천344책이 보관돼 있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춘추관·충주·성주의 3대 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본 실록만 유일하게 보존됐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정읍 태인의 선비 손홍록과 안의 등이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으로 이안(移安)한 덕분이다. 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다시 출판해 한양 춘추관·강화도 정족산사고·평창 오대산사고·봉화 태백산사고·무주 적상산사고 등 5대 사고에 봉안했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정족산사고에 보관됐지만 지금은 서울대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



전주사고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91년 복원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472년간의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과 이를 지켜내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노력, 다양한 재현을 통해 감상하고 우리 기록유산이 간직한 위대함과 소중함을 느껴보는 공간"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그림과 도표를 통해 전주사고 변천사, 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피난), 실록 편찬방법, 실록의 과학적인 보관방법 등을 알 수 있고, 복본으로 제작된 조선왕조실록을 직접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 마저 불타버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순간 온몸에 전율 같은 서리가 내려앉는다.



전주사고에서 동편 문을 나와 경기전 정문 쪽으로 내려오면 예종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 둔 태실(胎室·전북 민속자료 제26호)과 가봉비가 있다.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에 있었던 예종의 태실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수거해 서울로 가져가면서 훼손된 것을 구이초등학교 부근으로 옮겨다가 1970년 경기전으로 옮겨 왔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세워진 비몸에는 '睿宗大王胎室'(예종대왕태실)이라 새겨져 있다.
태실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조경묘(肇慶廟·전북 유형문화재 제16호)가 있다. 영조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771년 경기전 북편에 조경묘를 건립했다. 이곳에서도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고종황제의 딸 이문용(1900∼1987) 여사는 말년을 조경묘 재실에서 보냈다. 왕실의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는 측면에서 경기전과 조경묘는 서울 종묘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 국내 유일 임금님 초상화 전문 '어진박물관'

조경묘 옆에는 국내 유일의 왕 초상화 전문박물관인 어진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개관한 어진박물관은 지상 1층에 태조 어진을 모신 '어진실1', 지하 1층에는 세종·영조 등의 어진이 있는 '어진실2', 어진을 봉안할 때 쓰였던 유물과 가마가 전시된 역사실과 가마실, 기획전시실, 수장고 등으로 구성됐다.
'어진실1'에서는 청룡포 태조 어진, 홍룡포 태조 어진,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영흥 준원전 태조 어진을 복원한 태조 어진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경기전 태조 어진은 수염이 흰 노년의 모습으로 덕 있는 군주 같은 느낌이 강하다. 준원전의 태조 어진은 수염이 검은 장년의 모습으로 무사상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총 26점 있었으나 현재는 어진박물관이 소장한 태조 어진 1점만 남아 있다.
'어진실2'에는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전시돼 있다.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25대 임금 중에서 현존하는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뿐이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추정해 그린 표준영정(국가 공인영정)이고, 고종과 순종 어진은 사진을 보고 모사한 것이다.
'역사실'에는 경기전 건립, 태조 어진 봉안 과정, 태조 어진의 수난과 보존, 태조 어진의 관리, 경기전 제례 등 경기전의 역사와 함께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의 전주 문화유산이 소개돼 있다. 어진을 이안하거나 봉안할 때 어진을 담아 두던 흑장궤, 제례 때 술항아리를 올려놓는 아가상(阿架床), 조경묘·경기전과 주변 경치를 함께 그린 건물 배치도 등 태조 어진과 관련된 유물, 풍남문(豊南門·보물 제308호) 현판이 전시돼 있다.
가마실에서는 어진을 봉안할 때 사용했던 신연(神輦), 1872년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어진 봉안 책임자인 배왕대신(陪往大臣)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교(駕轎)를 볼 수 있다. 고종 9년(1872) 태조 어진을 한양에서 전주로 모실 때 7박 8일 걸렸고, 당시 봉안행렬 인원은 300∼400명으로 추정된다. 닥종이인형 반차도는 의궤에 나온 태조 어진 봉안행렬을 전주 한지로 재현한 것이다.
어진박물관 옆 경기전 서편의 부속건물들은 2004년 복원한 것이다. 일제는 1919년 태조 어진이 봉안된 정전 영역만을 남겨두고 부속건물들을 모두 철거했고 소학교를 건립했다. 태조 어진을 수호하고 제를 지내기 위한 수복청·마청·용실·전사청·수문장청 앞에서 한복을 차려입고 기념 촬영하는 여행객들이 많이 보인다. 봄날 아지랑이 사이로 조선 시대의 한 거리를 누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 이성계가 '대풍가' 읊었던 오목대

오목대(梧木臺·전북 기념물 제16호)는 경기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나지막하게 솟은 펑퍼짐한 언덕바지를 말한다. 한옥마을에서 오목대로 오르는 길은 약간 가파르지만 쉽게 오를 수 있는 나무 덱이다. 정상에 서면 넓고 평평한 땅에 세워진 정자와 비각이 눈에 들어온다. 한옥마을과 경기전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황산대첩(荒山大捷)을 거두고 돌아가는 길에 일가친지를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는 장소로, 이성계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오목대엔 '태조가 잠시 머무른 장소'라는 뜻의 고종 황제의 친필이 새겨진 비도 있다.
오목대에서 왕복 6차선 도로 위 육교를 건너면 발산 중턱에 이목대(梨木臺·전북 기념물 제16호)가 자리 잡고 있다.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나고 자란 곳으로,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 후백제 왕궁지로 알려진 동고산성

조선왕조 발상지인 전주는 서기 900년부터 936년까지 37년간 후백제 도읍이었다. 후백제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일본·중국·오월 등과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무주와 강주(지금의 진주) 등에 지방관을 보내 통치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935년 후계 문제로 갈등을 빚은 장남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갇혀 있다가 달아나 왕건을 찾았고, 1년 뒤인 936년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했다.
후백제에 대한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견훤이 머문 왕궁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후백제 왕궁터와 관련해 동고산성설,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 등이 있다. 전주 후백제문화사업회 위원장을 지냈던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가 주장한 '동고산성설'은 1980∼90년대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동고산성(東固山城·전북 기념물 제44호)은 승암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천712m에 이른다. 모두 8차례의 학술발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주 건물 터를 비롯해 약 13개 건물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 건물 터에서 출토된 수막새와 암막새에 새겨진 '全州城'(전주성) 글자는 이곳이 견훤이 쌓은 산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거론된다.
동고산성 서쪽 성벽의 서문지 규모는 우마차 2대가 교행할 수 있는 정도인 너비 6.1m, 높이 2.2m로 동고산성의 정문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지는 성벽을 서로 어긋나게 만들어 그 사이를 출입로로 이용한 어긋문 형식이다. 동문지는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리는 현문식 구조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의 강원종 학예연구실장은 "동고산성 건물터에서 온돌이나 부뚜막 터가 발견되지 않았고, 일상생활용 유물도 거의 출토되지 않아 왕궁이라기보다는 피난성(避難城)이었을 개연성이 높다"며 "최근엔 전주시 덕진구 중노송동 인봉리와 문화촌 일대가 왕궁터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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