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참새방앗간] 동백꽃이 기가 막혀

입력 2018-03-19 08:30   수정 2018-03-19 08:36

[윤고은의 참새방앗간] 동백꽃이 기가 막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2011년 인기를 끈 드라마 '최고의 사랑'의 톱스타 독고진은 한물간 가수 구애정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가 차이자 이렇게 퍼부었다.
"동백꽃 얘기를 해주겠다. 주인공은 빠지는 것 없이 괜찮은 애다. 그런데 어쩌다 동네 찌질이를 좋아하게 됐고 그 녀석에게 찐 감자를 줬다. 하지만 거절당했다. 주인공은 그 찌질이가 소중히 여기는 닭을 처절하게 괴롭혔고 결국 그 녀석은 울면서 싹싹 빌었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을 패러디한 대사로 폭소를 자아내는 장면이었다. 곳곳에 웃음 폭탄을 장착했던 이 로맨틱 코미디는 주연을 맡은 남녀 배우의 연기와 코믹 발랄한 대본이 조화를 이루며 사랑받았다.
덕분에 1936년에 발표된 후 70여년간 대입시험 지문에 등장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동백꽃'이 세월을 건너뛰어 젊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의 아이콘이 됐다. 드라마에 사랑을 고백하는 매개체로 감자가 몇차례 등장한 것 역시 웃음을 실어날랐다.
그 '동백꽃'이 최근 봉변을 당했다. "동백꽃은 처녀('점순')가 순진한 총각을 성폭행한 내용이다. 얘(남자 주인공)도 미투 해야겠네"라니. 사춘기 남녀의 풋사랑을 당시 사회상과 함께 익살스럽고 유쾌하게 조명한 '동백꽃'의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에서 한순간에 성범죄극으로 바뀌어버렸다. '동백꽃'이 뒷목 잡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일이다.
일단 사실관계가 틀렸다.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퍽 쓰러진 것은 맞다. 그러나 소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조금 있더니 요 아래서' 점순이의 어머니가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 말구 어딜 갔어?"라며 딸을 불러 제낀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 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 아래로 내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 위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가 '동백꽃'의 마지막 문장이다. 무엇보다 '나'는 동백꽃 속에 파묻히면서 이런 느낌을 토로한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동백꽃'의 시골 총각 '나'를 '미투' 조롱에 동원하다니. 관객모독이다. '나'는 '테스'의 기구한 시골 처녀 '테스'가 아니며, '미투' 조롱을 위해 태어나지도 않았다.
'동백꽃'도, '점순'도, '나'도 명예가 훼손당했다.
prett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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