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70주년] ② "빨갱이로 보는 눈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입력 2018-03-30 06:11   수정 2018-03-30 07:43

[4·3 70주년] ② "빨갱이로 보는 눈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후유장애인·수형인 생존자들 육체적·정신적 아픔은 현재 진행형
재심 청구·후유장애 인정 법정 투쟁…"살아생전 이 고통 끝나기를"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턱이 없더란 말이야. 제대로 먹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평생을 살았주(살았지)."
고(故) 진아영 할머니는 온 제주도가 핏빛으로 물들던 1949년 1월 제주시 한경면 판포리에서 아무 이유 없이 군경토벌대 총격에 맞아 아래턱이 사라졌다.
2004년 아흔 살에 모진 인생이 다할 때까지 그는 무명천으로 아래 얼굴을 감싸고 살아왔다. 그래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진 할머니처럼 4·3 이후 정신·육체적 고통 속에 살다 생을 마감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존자는 113명에 불과하다. 그들 역시 후유장애와 수형자 낙인 등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찢기고 헤진 마음을 '무명천'으로 감싼 채 70년을 살아온 이들이 살아생전 4·3의 아픔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 "아무 죄 없는데 옥살이…70년 계속된 누명 언제 벗을지"
양일화(89) 할아버지는 열여덟 살이던 1948년 12월 산간마을인 한림 금악리 출신이란 이유로 제주시 이도동에서 우익 단체 '대한청년단'에 붙잡힌 뒤 경찰에 넘겨졌다.
이후 고문과 협박 속에 강제 작성된 조서로 내란죄를 뒤집어쓰고 3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당시 당한 심한 구타로 무릎과 오른쪽 어깨 등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를 앓고 있다.
무엇보다도 수형인이라는 낙인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양 할아버지는 지난해 불법 군사재판에 의한 형을 무죄로 해달라며 수형인 18명과 함께 제주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빨갱이니, 좌익이니, 삼팔선이니 아무것도 몰랐다. 출소 후에는 자식들이 연좌제에 묶여 직장다운 직장도 다니지 못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주 4·3 관련 수형인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불법 군사재판으로 인천·대전·대구 등 전국 형무소에 분산돼 수감된 이들이다.
재심 결과가 언제쯤,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양 할아버지는 아흔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는 "4·3 생존자가 이젠 많지 않다"면서 "4·3 후유장애인과 수형인, 유족 등에 대한 폭넓은 명예회복과 지원을 담은 제주4·3 특별법 개정이 이뤄져 서둘러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할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역사의 아픔을 담은 자서전 '4.3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를 최근 펴냈다.


◇ "몸과 마음 모두 다쳐…지금도 깜짝깜짝 놀라"
1948년 12월 추운 겨울 어느 날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자연동굴 입구에 총알이 빗발쳤다.
당시 다섯 살이던 양창옥(75) 할아버지는 함께 숨어 있던 어머니와 경찰서 유치장과 수용소로 끌려다니며 무자비한 구타와 배고픔을 겪다 가까스로 이듬해 4월 풀려났다.
양 할아버지는 "어린아이라고 봐주지 않았다"면서 "경찰이 다리를 잡고 내팽개쳐 무릎뼈 장애를 얻었다"고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에도 시달렸다. 그는 "지금도 경찰만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무슨 죄를 짓지 않았지만 해코지할 것만 같아 움츠러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 할아버지는 아직 후유장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총상이 있는 다른 장애인과 달리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2008년에는 국가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신경외과·정신과 등의 진료기록을 떼 서울행정법원을 오갔지만 결국 허사였다.
양 할아버지는 "실제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는데 불인정이라니…"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후유장애를 인정받아야 내 한이 풀리겠다"며 기회가 오면 국가로부터 후유장애 인정을 끌어낼 방안을 찾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 세 살 생일 날 다리에 총상…"지금도 생생한 그때 공포"
1948년 11월 13일 산간마을인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그날은 김순여(73) 할머니의 세 번째 생일이었다.
군인이 쏜 총알은 세 살배기의 왼쪽 다리를 관통했다. 그리고선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허리춤을 뚫고 나갔고, 앞에 서 있던 일곱 살 터울 오빠 머리에 박혔다.
비명조차 못 지르고 숨을 거둔 아들을 끌어안고 총상 입은 딸을 등에 업은 어머니는 숲으로 달아났다.
김 할머니는 "세 살 때긴 하지만 우리 집이 불에 타는 장면은 거짓말처럼 기억이 난단 말이야. 그때 기억만은 잊히지 않아"라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4·3 당시 부상을 제대로 치료도 못 한 어머니는 후유증으로 이미 2011년 유명을 달리했다.
김 할머니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치료는커녕 하루하루 벌어먹을 걱정에 앞이 캄캄했다"면서도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기회가 생긴 점이 지금은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소박하게 말했다.


◇ 억울함, 마음속으로 삼켰다지만 "명예회복은 됐으면…"
제주시 삼양동에서 나고 자란 송갑수(86) 할아버지도 오른쪽 다리에 총상 흔적이 있다.
열다섯 살이던 1947년 가을 마을 인근 오름인 원당봉 부근 밭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맞았다.
경찰은 피를 흘리는 그를 3㎞ 떨어진 경찰지서로 끌고 갔다. '좌익 세력의 폭동 음모가 있다'는 첩보로 당시 경찰은 젊은 남성만 보면 총을 쏘고 무조건 잡아들였다.
그는 사흘간 제1구경찰서(옛 제주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혐의가 없다는 점이 밝혀져 풀려났다.
송 할아버지는 "억울함? 그거 마음속으로 삼켰어. 내 몸 어디엔가 있겠지"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4.3을 겪으면서 주변에서 빨갱이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는데 70년이 지난 만큼 이제는 그런 오해가 완전히 벗겨져 명예회복이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kos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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