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입력 2018-05-10 08:01  

[연합이매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지뢰꽃길' 걸으며 한반도 평화 소망하다

(철원=연합뉴스) 이창호 기자 =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DMZ(비무장지대), 청정자연이 숨 쉬는 '쇠둘레' 땅 철원. 쇠둘레는 강원도 철원(鐵原)의 순우리말 이름이다. 우리나라 중부 제1의 곡창인 철원평야는 27만 년 전 북한 땅 평강의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용암대지다. 궁예가 세웠던 태봉(泰封)의 수도였던 철원읍은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京元線) 철도가 놓이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떠올랐고 철도를 통해 수탈자원이 옮겨졌다. 해방 이후 '38선 이북이면서 휴전선 남쪽'인 '수복지구'(收復地區) 철원읍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산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잿더미가 되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과 한국전쟁의 상흔은 가슴 깊이 통증으로 남게 된다.



한탄강(漢灘江)이 굽이쳐 흐르는 철원에는 용암이 빚어낸 현무암 협곡과 30m 높이의 수직 절벽 등 주상절리, 전쟁의 상흔이 깃든 아름다운 산야와 천혜의 자연경관을 도보로 두루 둘러볼 수 있는 한여울길이 있다. 광복 직후 38선이 그어지면서 남북을 분단하는 경계선이 되어 '한탄강'(恨嘆江)이기도 했던 한탄강은 예부터 '한여울'로 불렸다.
한여울길은 모두 6개 코스에 52.4㎞로,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1코스(승일공원∼고석정∼직탕폭포∼구 양지통제소, 11㎞)와 2코스(군탄교∼송대소∼태봉대교∼윗상사리, 5.1㎞)는 한탄강의 절경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주상절리길이다. 3코스(덕고개마을∼노동당사∼수도국지∼백마고지역, 14㎞)는 전쟁과 분단의 아픈 상처와 농촌의 넉넉한 인심이 공존하는 길이고, 4코스(철원향교∼동주산성전망대∼새우젓고개, 3.5㎞)는 철원군민의 삶과 애환이 깃들어 있다. 5코스(노동당사∼지뢰꽃 시비∼소이산 정상∼노동당사, 4.8㎞)와 6코스(대교천생태공원∼학저수지∼개구리산∼철원학마을센터, 14㎞)는 이야기가 있는 생태탐방로다.
2012년 개통한 5코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원점회귀형으로, 2시간이면 넉넉히 걸을 수 있다. 전체 구간은 지뢰지대로 철책을 곁에 두고 걷는 '지뢰꽃길'(1.3㎞),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을 걸으며 소이산의 생태환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생태숲길'(2.7㎞), 철원평야와 평강고원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수대오름길'(0.8㎞)로 나뉜다.
논바닥에 떠 있는 작은 섬 같은 소이산(所伊山·362m)은 철원평야와 표고 차가 200여m에 불과한 야트막한 동산으로 보이지만 철원의 대표 명산이다. 고려 시대부터 외적의 출현을 알리던 봉수대가 있던 소이산의 정상에 오르면 드넓은 철원평야와 북녘의 평강고원, 백마고지, 김일성고지, 철원제2금융조합, 얼음창고, 농산물 검사소, 노동당사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일남 문화관광해설사는 "탁월한 조망권을 자랑하는 소이산은 고려 때부터 봉수지로 활용했는데, 철원의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오롯이 겪은 산"이라며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통제선 지역으로 수십 년간 묶여 있다가 해제됐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사이 수풀이 우거진 숲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 '비극의 현장' 노동당사, 앙상한 뼈대만 남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노동당사를 들머리로 삼아 오른다. 해방 직후 북한이 지은 러시아식 건물인 노동당사는 양민수탈과 수많은 주민이 체포, 고문,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서태지의 뮤직비디오 '발해를 꿈꾸며' 촬영지인 노동당사는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데 총탄과 포탄 자국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듯한 건물은 보면 볼수록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이 더욱 가슴을 저민다.
노동당사 주차장 앞 길가에는 일제강점기에 세운 옛 철원군 도로원표(道路元標)가 세워져 있다. 도로원표가 위치한 곳은 도청·시청·군청 등 행정의 중심지, 교통의 요충지,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를 뜻하는데 돌기둥 도로원표에는 평강 16.8㎞, 김화 28.5㎞, 원산 181.6㎞, 평양 215.1㎞, 이천 51.4㎞가 새겨져 있다. 포천 부분은 총탄 자국으로 숫자가 훼손되고 ㎞만 남아 있다. 도로원표에서 464번 지방도로를 건너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 안내판을 만난다.
안내판에서 가야 할 길을 확인하고 소이산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다 보면 삼거리다. 오른쪽의 논두렁을 따라가면 지뢰꽃길 입구인데, 도로 한쪽 옆을 걷다가 소이산 전망대로 바로 올라가는 '봉수대 오름길'로 접어든다. 도로에서 가까운 임도 차량 통행 차단기를 지나면 나름 가파른 길이 나타난다. 조금 더 오르면 '생태숲길'로 가는 이정표와 만난다. 생태숲길을 뒤로 하고 임도를 따라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려 시대부터 이곳에 봉수지가 있어 길 이름도 '봉수대오름길'인데 소이산은 경흥-회령-길주-함흥-영흥-안변-철원-양주-서울(남산)에 연결되는 제1선인 경흥선 봉수로에 속했다.
오르막길을 제법 가다 보면 철조망 안으로 평화마루공원이 보인다. 이곳은 미군과 한국군이 번갈아 주둔했던 군사적 요지로, 산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지하 교통호가 다 뚫려 있고 그 안에는 물탱크, 화장실, 탄약고, 발전실 등 수많은 진지와 벙커가 들어서 있다.



◇ 손에 잡힐 듯한 한국전쟁 격전지 '백마고지'

미군 막사로 사용하던 건물과 탄약고를 지나면 바로 소이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나무 덱(Deck)이 깔렸고, 철원 출신인 정춘근 시인의 시 '지뢰융단'이 새겨진 목판이 있다. 나무 덱 아무 곳에서나 북녘을 바라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용암대지 철원평야와 산명호, 전략촌이라는 민북마을 대마리와 구 철원 시가지, 그 너머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비무장지대와 평강고원이 펼쳐진다.
철원 9경 중 하나가 소이산에서 바라보는 소이산 '재송평'(裁松平)이다. 재송평은 조선 시대 왕의 수렵이나 군사 훈련을 위해 벌목이나 경작이 금지됐던 강무장(講武場)이었지만 지금은 드넓은 평야다. 평야는 모내기를 위해 물을 대면 거대한 호수로 변해 마치 염전에 물을 담아놓은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특히 벼 이삭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풍광은 황금들판의 향연이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백마고지(백마산), 김일성고지(고암산), 아이스크림고지도 손에 잡힐 듯하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도선국사가 궁예에게 태봉국의 주산으로 삼으라고 권유했던 금학산(金鶴山·947m)과 고대산(高臺山·832m)이 웅장한 산세를 뽐낸다.
평화마루공원을 나와 왼쪽 계단으로 소이산 전망대로 올라간다. 전망대의 팔각정자에 오르면 주변 지형을 알려주는 투명한 안내판이 있다. 노동당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고 그 너머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른다.




봉수대에서 다시 임도를 따라 내려가 '생태숲길'로 들어선다. 손때 묻지 않은 흙길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보라색 제비꽃과 연분홍 진달래가 수줍게 반긴다. 찔레꽃 향기는 그윽하다. 이따금 나타나는 참호와 막사 등 군사시설이 최전방임을 일깨운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하며 풀과 나무를 키워 울창한 숲을 일궜다. 시민단체인 '생명의 숲'은 2006년 소이산을 '천년의 숲' 수상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눈 닿는 곳 어디나 초록과 연분홍 세상이다. 느릿느릿 걷다 보면 민북마을 대마리와 백마고지가 지척인 조망대가 나온다. 냉전 시대의 산물인 민북마을은 수복 지역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 식량 증산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북한의 침략에 즉각 대응하면서 대북 심리전에도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건설한 선전마을로 '전략촌'이라고 한다. 1968년 150세대가 입주해 세워진 대마리는 지뢰밭을 일궈 세운 마을로, 개간과정에서 지뢰폭발로 11명이 죽고 8명이 팔다리를 잃었다고 한다.
논 가운데 솟은 백마산은 약 30만 발의 포탄 폭격으로 인해 옛 지형이 백마가 누운 형상으로 변했다고 해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전쟁 당시 열흘 동안 24번이나 주인이 바뀐 격전지로 중공군 1만여 명, 국군 3천500여 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 분단 역사와 화해의 길 더듬는 '지뢰꽃길'

고목이 넘어져 있는 시멘트 참호 옆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철조망에 '지뢰'라고 쓰인 삼각 팻말이 걸린 '지뢰꽃길'이다. "이 지역은 지뢰지대로 출입을 절대 금함"이라는 경고문도 붙어 있어 자못 긴장하게 된다.
비무장지대 일원은 남쪽에 약 130만 발, 북한 쪽에 약 200만 발 등 총 330만 발의 지뢰가 매설돼 세계에서 지뢰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민통선 지역의 미확인지뢰 지대는 121㎢에 달한다. 이들 지뢰를 모두 제거하는 데 걸리는 기간을 추산하면 489년이나 된다고 한다. 비무장지대 인근 민통선 지역에는 한국전쟁 이후 군 작전 용도로 많은 지뢰가 매설되었다.
철조망에 걸려 있는 '양지리 검문소1' '철마는 달리고 싶다' '막판농사' '사랑은 밥이다' '가을 들판' 등 철원지역 문인들의 시들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 지는/ 이름없는 꽃/ 꺾으면 발 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 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 가는/ 병사들 몸에서도/ 꽃 냄새가 난다."
정춘근 시인의 시 '지뢰꽃'이 유난히 눈에 꽂힌다.



철조망 아래에는 노루오줌, 할미꽃, 물망초, 구절초, 산오이풀, 벌개미취, 범부채, 노랑붓꽃, 산수국 등이 심어져 지뢰의 땅임을 잊게 한다. 도로의 대전차 방호벽에 '북한을 박멸한다'는 의미인 '멸북' 글자가 아직 선명한 철원 땅에서 철조망 아래 피어난 꽃은 남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철조망 안쪽을 도는 '지뢰꽃길'을 빠져나오면 노동당사와 주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동당사 주차장까지는 평탄한 산책로가 이어지고, 길섶의 나무와 풀은 햇살을 맞으며 온몸을 흔든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changh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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