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안동 천등산 봉정사

입력 2018-06-11 08:01  

[연합이매진] 안동 천등산 봉정사
봉황 머문 자리에 앉은 '건축박물관'

(안동=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경상북도 안동시 천등산 아래 자리한 봉정사(鳳停寺)는 '한국의 건축박물관'으로도 불린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인 극락전(국보 제15호)부터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되는 대웅전(국보 제311호), 조선 중기 건축물인 화엄강당(보물 448호)과 고금당(보물 449호) 등 고려부터 조선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건축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에 비해 소박하고 단정한 것이 이 산사의 멋이다.



봉정사는 봉황(鳳)이 내려앉은(停) 곳에 세워졌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대덕이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던 중 홀연히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이 '낭군님의 지고한 덕을 사모해 찾아왔다'며 유혹했다.
능인대덕은 여인의 끈질긴 유혹을 뿌리치며 꾸짖었고 결국 돌아선 여인은 '옥황상제의 명으로 당신의 뜻을 시험했다'며 하늘의 등불을 보내주었다. 능인대덕은 그 환한 빛의 도움으로 수행에 더욱 매진해 득도했고, 대망산은 하늘(天)에서 내려온 등불(燈)이라는 뜻의 천등산으로, 바위굴은 천등굴로 불렸다.
이후에도 수행에 정진한 능인대덕이 높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날려 머문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 지었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영주 봉황산에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들어 날려 보낸 봉황이 내려앉은 곳에 봉정사를 세웠다는 설화도 있지만, 부석사 창건(676년)이 봉정사보다 늦어 맞지 않는다.



천등산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단정히 정비된 숲길이 이어진다. 빼곡한 참나무숲 사이로 들려오는 새소리와 5월의 신록을 만끽하며 슬렁슬렁 일주문을 지난다.
보통 일주문 다음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문이 나오지만, 이곳은 물이 만나는 합수 명당이라 사천왕문이 없다고 김미자 문화관광해설사는 설명했다.
인공적으로 다듬지 않은 돌계단을 오르면 돌담을 낀 2층짜리 누각인 만세루가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 누각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지만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웅전을 앞에 두고 누각의 낮은 입구를 지나고 돌계단을 오르려면 머리와 허리를 숙여야 한다. 귀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낮춘다는 불가의 가르침을 자연스레 따르게 된다.
계단을 올라와 뒤돌아서면 마주하는 만세루의 2층에는 물속 생물의 구원과 해탈을 위해 두드리는 목어(木魚)와 네발 달린 짐승의 구원과 해탈을 비는 법고(法鼓), 날아다니는 짐승을 구원하는 운판(雲版)이 걸려 있다.
네 가지 법구인 사물(四物) 중 지옥에 빠진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울리는 범종(梵鐘)만 오른쪽에 따로 떨어져 있다.



◇ 고려·조선 시기별 건축물 모여있는 '박물관'

대웅전 왼편에 나란히 자리한 극락전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꼽힌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복원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지붕을 크게 수리(중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전통 목조 건물을 크게 수리하는 것은 통상 신축하고 나서 100∼150년이 지나서이기 때문에 극락전이 12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극락전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동안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알려졌던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중수 시기가 앞선 것이 명확히 확인되면서 명실공히 최고(最古)의 자리를 차지했다.
극락전은 배흘림기둥과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에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통일신라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바닥에 깔린 돌이 살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반사해 어두운 내부를 밝힌다.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락전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평하면서 "지붕이 높지 않고 낮게 내려앉아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긴다"고 찬사를 보냈다.



대웅전은 여덟 팔(八) 자 모양의 팔작지붕에 공포가 기둥 위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고려말·조선 초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의 기둥에는 발톱까지 생생한 용 등 단청 문양이 잘 남아있고, 1997년에는 대웅전 초창기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후불 벽화(영산회상벽화·보물 1614호)도 발견돼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 대웅전 지붕을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과 묵서명(붓으로 쓴 글씨) 등에서 '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 년에 이르러 법당을 중창하다'라는 내용이 나와 창건 연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1361년 탁자를 제작해 시주한 사람의 이름까지도 나왔다.
이 기록들을 통해 조선 초 봉정사가 팔만대장경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1만여 평의 논밭과 안거스님 100여 명, 75칸의 대찰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대웅전에는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툇마루가 있다. 입구인 만세루 문에 남아있던 태극 문양과 함께 절에 스민 조선 시대 유교의 흔적이다.
보물인 화엄강당과 고금당은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승려들이 교학을 공부하는 화엄강당은 온돌방 구조이고, 승려가 기거하는 요사채로 쓰이는 고금당은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해 주목받고 있다.



◇ 단정하고 소박한 민가 같은 영산암

봉정사 동쪽, 요사채 뒤쪽에 자리한 부속 암자인 영산암은 19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적 의미는 크지 않으나 꽃과 나무, 석등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3단 마당과 단정하고 소박한 한옥을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기는 아깝다.
전체적으로 미음(ㅁ)자의 닫힌 구조지만 폐쇄적이기보다 아늑하다. '꽃비가 내리는 누각' 우화루(雨花樓), '마음을 바라보는 집' 관심당(觀心堂) 등 이름마저 예쁘다.
198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개봉 당시 관객과 평단 모두 영화에 담긴 빼어난 영상미를 인정했다.
일체의 장식물 없이 엄숙한 대웅전 마당, 귀여운 삼층석탑과 화단이 정겨운 극락전 마당이 정연하다면, 감정 표현이 많으면서도 일상의 편안함이 깃든 영산암 마당은 유 교수가 꼽은 봉정사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 영국 여왕도 방문…세계유산 될까

유 교수는 봉정사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사'로 치켜세웠다. 멀게는 고려 태조와 공민왕이, 가깝게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갔다. 하지만 봉정사는 최근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사전 심사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세계유산위원회(WHC) 자문기구로 세계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한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7개 사찰 중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보은 법주사, 해남 대흥사만 등재를 권고한 것이다.
봉정사는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와 함께 등재 권고에서 제외됐다. 세 사찰은 역사적 중요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고, 특히 봉정사는 다른 사찰과 비교해 규모가 작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문화재청은 이코모스 등재 권고에서 제외된 3개 사찰까지 포함해 7개 사찰이 모두 등재될 수 있도록 자료를 보완하고 위원국 교섭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지난해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무나카타·오키노시마와 관련 유산군' 8곳 가운데 4곳만 등재 권고를 받았으나 8곳이 모두 등재된 사례가 있다. 봉정사 등의 세계유산 등재 여부는 6월 말 바레인에서 열리는 제42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 물소리 요란한 명옥대, 퇴계가 놀던 곳

봉정사 가는 길 초입에서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 계곡 큰 바위에서 작은 바위로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다.
안동 출신의 조선 중기 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은 10대 때 숙부이자 스승인 이우의 주선으로 잠시 봉정사에서 공부하면서 이곳에 와 놀았다는 기록을 직접 남겼다.
"절의 입구에는 기이한 암석이 여러 층이나 있다. 그 높이가 여러 길은 됨 직하며 물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데,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지난 병자년 봄에 나는 종제인 수령과 이 절에 깃들어 여러 차례 이곳에서 놀았다."
말년의 퇴계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에 내려와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폭포를 만드는 바위는 그저 '물 떨어지는 곳'이라는 뜻의 '낙수대'(落水臺)로 불렸지만, 이황이 오나라 사람인 육사형의 시에 있는 '솟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내리네'(飛泉漱鳴玉)에서 글귀를 따 '명옥대'(鳴玉臺)로 바꾸고 친필로 바위에 새겼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구슬을 울리는 소리 같았나 보다.
퇴계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함께 놀았으나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그리워하며 두 편의 시를 남겼다.

이곳에서 노닌 지 오십년
(此地經遊五十年)
아름다운 얼굴 봄날에는 온갖 꽃 앞에서 취했었지
(韶顔春醉百花前)
함께한 사람들 지금은 어디 있는가
(只今携手人何處)
푸른 바위 맑은 폭포는 예전 그대로인데
(依舊蒼巖白水懸)

맑은 물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이한데
(白水蒼巖境益奇)
와서 보는 사람 없어 산골물도 숲도 슬퍼하네
(無人來賞澗林悲)
훗날 호사가가 묻는다면
(他年好事如相問)
말해주오 퇴계 늙은이 앉아 시 읊었다고
(爲報溪翁坐詠時)

후학들이 이곳에 정자를 세운 것은 퇴계의 사후인 1667년이다. 처음 퇴계의 시에 나오는 '창암'(푸른 바위)을 따 '창암정사'(蒼巖精舍)로 지어졌을 때의 원형은 거의 상실돼 건축적 가치는 크지 않다. 원래 뒤쪽 두 칸은 방으로 꾸며졌던 흔적이 남아있으나 후대에 사면이 개방된 누마루로 개조해 경관을 즐기기 좋게 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mihe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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