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銀 개성지점장 "공단 10개만 생기면 통일된다 했는데…"

입력 2018-06-18 06:40  

우리銀 개성지점장 "공단 10개만 생기면 통일된다 했는데…"
문 닫은지 2년, 6대 지점장 최호열씨 "제재 풀리면 내일이라도 문열어"
"'부장선생' 부르던 北직원들…한달만에 거래처 계좌번호 줄줄이 외워"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우리은행[000030] 개성지점 창구직원(텔러) 리숙희(여·가명)씨는 입술을 꽉 물고 최호열 부지점장 책상 앞에 섰다. 앳된 얼굴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부장(최 부지점장의 직급) 선생, 1달러."
뒷말을 줄였지만, 무슨 뜻인지 최 부지점장은 알았다. 시재(時在)가 1달러 빈다, 즉 금고 잔액이 전산 장부상 금액보다 적다는 것 아닌가.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1달러, 그래서…?"
"…해결해주시라요."
리씨는 귀 끝까지 벌게졌다. 자신이 남측 기업에 직접 전화하긴 껄끄럽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농이 지나치면 탈 나겠다 싶어 최 부지점장은 정색하고 물었다. "그래서 누구인 것 같소?"
"○○공업 김 선생 같습네다"라는 말에 최 부지점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리씨 말대로였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공업이 1달러를 더 받아갔다. 시재는 곧 맞춰졌다.
최 부지점장이 18일 기억한 2014년 어느 날 오후의 장면이다. 리씨는 이듬해 공단 내 다른 영업소(124개 입주 기업을 지원하는 은행 등 서비스 업체)로 근무지를 옮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년 된 해외공관 직원들의 교대근무를 지시했던 때였다. 은행 근무 3년이 된 리씨도 마찬가지였다.
또 해가 바뀐 2016년 2월 10일, 최 부지점장은 쫓기듯 서울로 돌아와 짐을 부렸다. 4차 핵실험 여파로 공단이 전격 폐쇄된 것이다. 그는 여전히 우리은행 개성지점에 근무하고 있다. 실제 영업소가 아닌 임시 영업소라는 점, 그리고 '부(副)'자를 떼고 지점장으로 승진했다는 것만 달라졌다.
은행은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리씨 같은 북한 주민에게 민간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거부감은 없었을까. 최 지점장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어 보였다. 대부분 개성 지역 3년제 대학 출신에 상업 회계 전공이었다. OT(초과근무) 수당 더 받으려고 일이 없는데도 휴일에 출근하려 해 여간 애를 먹었던 게 아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뻣뻣했다. 허리 숙여 손님을 맞는 우리나라 은행원들과는 달랐다. 죄다 남측 사람인 입주 기업 직원들에게 이들은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남측에서 걸려온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더니 한 달도 안 돼 적응하더라. 입주 기업 직원이 파란색 전표(자금 지급요청 서류)만 들고 들어와도 컴퓨터에 '지급'을 눌러놓고 계좌번호까지 미리 입력해두는 모습을 봤다. '저 사람이 어느 업체고, 계좌번호는 몇번'이라는 걸 다 외운 것이다."
일 매무새가 꼼꼼하고, 야무지다. 자존심이 세서, 남측 사람한테 지적받는 걸 싫어한다. 책임감이 강하다. 더러 시재가 안 맞아도 1∼2달러 정도였는데, 자기들(북측 텔러 4명)끼리 머리 맞대고 금방 해결하더라는 게 최 지점장이 리씨 등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그래도 남북 생활 수준의 격차는 어쩔 수 없었다. 공단에서 일하던 북한 주민은 5만5천명가량이었다.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입소문이 빨랐다. 입에서 입으로 '남측 사람들 잘산다'는 말이 퍼졌다. 입주 기업의 자금 출납을 관리하는 은행원은 더했다. 개성공단 근로자의 기본급은 73달러였는데, 남측 입주 기업 근로자 임금은 수십∼수백배였다.
북측 텔러들에게 보너스를 마음대로 줄 수는 없었다. 우리은행은 대신 남측에서 난 '노보물자(노동보호물자)'를 얹어줬다. 처음에는 초코파이와 라면 따위였다가 차츰 샴푸·비누·치약이나 커피 등으로 다양해졌다. 직접 쓰는지, 장마당에 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어쨌든 노보물자를 받으면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고 한다.
최 지점장은 "당시 공단 사람들 사이에 '이런 공단이 10개만 있으면 곧 통일될 것'이라는 얘기가 오갈 정도로 북한 사회에 개성공단의 파급력은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1단계(100만평 규모, 임가공 위주)에서 멈춘 개성공단이 애초 계획대로 3단계(2천만평, 근로자 50만명, 첨단산업 중심)까지 확대되거나, 공단이 또 조성되거나, 철도·도로 같은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을 투자하는 등 어떤 형태로든 경협이 확대되면 경제 분야부터 통일이 앞당겨지지 않겠느냐고 최 지점장은 조심스레 예상했다.
현재로선 단순 자금 출납만 취급할 수 있어 적자지만, 경협 활성화에 맞춰 지점을 늘리고 외환 업무나 현지인(북한 주민) 대상 영업으로 확대하면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물론 핵 문제가 해결돼 공단 가동이 재개되고, 금융거래를 금지한 유엔의 대북 제재가 해제돼야 하는 등 난관은 적지 않다"면서도 "당장 내일이라도 풀리면 지점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된 상태"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은행 개성지점은 공단에서 쓰던 별도의 전산망을 현재도 쓰고 있다. 이 시스템을 그대로 들고 가 전원만 켜면 된다.
최 지점장은 2004년 이후 6번째 개성지점장이다. 그는 "내가 문을 닫고 나왔으니, 다시 열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 다시 열면 예전처럼 철수나 전면 중단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zhe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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