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첩의 현장' 행주산성에 분 평화의 바람
(고양=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바다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충장공 권율 장군이 있었다.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던 임진왜란. 패퇴를 거듭하던 조선 육군은 권율 장군의 빼어난 리더십과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로 적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고양행주문화제는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행주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고 권율 장군과 순국선열들의 헌신적 애국정신을 기리는 행사다. 올해로 31회째를 맞은 이 문화제의 열기 속으로 들어가 봤다.

"105만 고양시민 대화합의 축제! 평화가 온다, 기회가 온다! 제31회 행주문화제 개막을 선언합니다!"
전통한복을 차려입은 초등학교 남녀 어린이가 씩씩하게 무대에 오르더니 당찬 목소리로 축제 개막을 온 세상에 알렸다. 객석의 환호와 함께 취타대 나발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무용단의 화려한 축하공연. 북의 향연과 훈령무, 달무리 공연이 남아의 기상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감명 깊게 보여줬다.
덕양산 행주산성의 대첩문 앞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 9월 8일 열린 개막식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풍선 날리기로 절정에 달했다. 내빈, 관람객 등 참가자들은 사회자의 외침과 동시에 각기 손에 든 하얀 비둘기 풍선을 파랗게 열린 하늘로 날려 보냈다. 가을바람을 타고 훌훌 날아오른 풍선들은 평화의 염원을 안은 채 창공 속으로 점점이 사라져갔다. 이와 동시에 대합창곡 '산성에 부는 바람'이 천지간을 뭉클하게 울렸다.
"드넓은 행주벌 달려온 바람이/ 덕양산 차고 올라 하늘에 흩어지면/ 산성은 눈을 감는다"

◇ 역사적 승전에서 이 시대의 평화로
경기도 고양시를 대표하는 역사문화축제인 고양행주문화제가 9월 8~9일 행주산성과 고양어울림누리, 화정문화의 거리, 덕양구청 등 시내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열렸다. '평화의 시작 미래의 중심, 고양'을 슬로건으로 내건 올해 축제는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열망을 가득 담았다.
축제는 참가자들이 행주산성 일대를 둘러보며 대첩의 숨은 이야기와 고양 600년 역사를 듣고 체험하는 '행주대첩 역사기행'으로 시작됐다. 이어 권율 도원수의 영정이 모셔진 충장사에서 고유제가 봉행돼 행주대첩의 호국영령들을 위로했다.
성대한 개막식과 축하공연에 이어 대합창 플래시몹 '산성에 부는 바람'과 드라마 형식의 전황 보고 '진중승첩'이 이어졌다. 권율 장군 동상 앞에선 지극정성의 '승전굿'이 진행됐다. 덕양구 중심가에서는 축제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시민 퍼레이드 '평화를 향한 걸음'이 펼쳐졌고, 저녁엔 뒤풀이마당으로 전통춤극 '명무전'이 흥겨운 한마당을 연출했다.
축제 이틀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선보였다. 행주산성 무대에서 고양시의 전통예술단체들이 신명 마당을 연출한 '전통민속놀이 한마당'이 진행됐다. 행주대첩을 재현한 작품 '뮤지컬 행주대첩'은 승전의 극적 감동을 듬뿍 안겼다. 화정문화공원에서는 안성남사당패 거리 공연을 비롯한 다양한 거리 예술이 축제 분위기를 띄웠다. 어울림누리의 어울림극장에선 전통소리극 '한씨 미녀'가 시대를 초월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이들 프로그램 중 권율 장군의 활약과 행주대첩의 현장을 감명 깊게 보여준 '뮤지컬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가보자.
무대는 전란 속에 부모와 집을 잃은 아이들이 "엄마! 엄마!"를 외치며 울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막이 열렸다. 자식을 잃은 엄마는 "개똥이가 왜군 놈들에게 잡혀갔어요. 도와주세요!"라고 울부짖는 가운데 왜군들은 납치해간 어린이와 아낙들을 갖은 학대와 모멸로 괴롭히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혜성처럼 등장한 권율 장군. 참상에 분개한 장군은 결연한 어조로 사생결단의 심경과 각오를 외쳤다.
"대장부란 의기(意氣)에 감동할 뿐 어찌 공명(功名)을 논하겠는가! 천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로 죽기를 맹세하자!"
가족과 함께 공연을 관람하던 박형식(43) 씨는 "행주대첩의 현장에서 무대극으로 직접 보니 당시 상황을 체험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라면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날 저녁에 공연이 진행돼서인지 가슴이 더욱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 外患에 대비했던 권율 장군과 백성들의 헌신
권율 장군은 누구일까? 그리고 행주대첩이 대승을 거둔 비결은 또 무엇일까?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은 한강 변 행주산성에 배수진을 치고 2천300명의 관군과 의병, 승군, 여성을 진두지휘해 무려 3만 명에 이르는 왜군을 격파하며 전세를 완전히 뒤집었다.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로 태어난 권율 장군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뛰어났으나 부귀와 권세에 연연하지 않은 성격 탓에 마흔 나이가 넘도록 과거를 보지 않다가 46살이 돼서야 문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부패 무능한 지도층 인사들은 너나없이 도망치기에 급급했고, 백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충격과 슬픔 속에 우왕좌왕해야 했다.
전대미문의 국난을 앞두고 우국충정의 몇몇 선각자들만이 이 같은 외환(外患)에 대비했으니 권율 장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선조의 명을 받고 광주목사로 간 장군은 장병들과 함께 항전하며 북진한다. 금산의 이치전투(7월)와 수원 독산성전투(12월)에서 잇달아 적을 물리친 장군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포진한 가운데 결전 태세에 들어갔다.
이에 일본군은 조선군의 열 배가 넘는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에워싼 채 이치전투와 독산성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했다. 2월 12일 새벽 6시 무렵에 시작된 전투는 저녁 6시까지 12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왜군의 공격은 번번이 패배로 끝났다. 전사 1만5천 명, 부상 9천 명이란 괴멸적 타격을 입은 왜군은 결국 무기를 버린 채 줄행랑쳐야 했다. 반면 조선군의 사상자는 130명에 그쳤다. 민·관·군이 단합해 싸운 행주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 대전환점이 됐다. 참패한 일본 육군은 퇴각을 거듭하다가 이순신 장군에게 완패한 해군과 함께 결국 조선 땅에서 쫓겨났다.
대첩 후 도원수가 된 권율 장군은 1599년 사후에 임금에게서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행주산성에는 승전의 그 날을 떠올리게 하는 시설들이 있는데 1602년 덕양산 정상부에 건립된 행주대첩 초건비(높이 178cm)가 대표적이다. 1970년 세운 충장사와 대첩문, 행주대첩비(높이 15.2m) 그리고 1980년과 1986년에 각각 들어선 대첩기념관과 권율 장군 동상(높이 4.5m) 역시 승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전하게 된 데는 권율 장군의 뛰어난 전략전술과 함께 최첨단의 과학무기들, 강과 절벽의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지리적 조건, 민·관·군의 혼연일체 협동정신이 있었다. 특히 부녀자들은 치마로 돌을 날라주는 등 너나없이 목숨을 걸고 나라 지키기에 앞장섰는데, '행주치마'는 여기서 비롯됐다.
'행주대첩 역사기행'의 안내와 해설은 맡은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은 "승전에 큰 힘이 됐던 여성과 승군, 의병 등은 이렇다 할 제사도 없이 상대적으로 기억에서 가려져 있어 안타깝다"며 "무명으로 목숨을 바친 뒤 사라져가신 영령들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의해 참가자들을 숙연케 했다. 기행에 동참한 김진석(40) 씨는 "고양시민으로 살면서도 행주대첩에 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했다"며 "특히 관군보다 더 많았던 의병, 승군, 여성들의 활약상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고 두 손을 모았다.


◇ '평화를 향한 걸음' 시민퍼레이드
축제는 잔치다. 일상을 떠나 놀이로써 일탈해 참가자 모두가 신분, 남녀, 노소, 빈부 등 일체의 차별과 차이를 딛고 하나가 돼 신명 나게 어울린다. 대동상생의 난장 한마당이 바로 축제의 본령인 것이다.
이 같은 축제의 정신을 구현한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은 첫날 오후 덕양구청과 어린이박물관, 화정문화광장의 1.6km 구간에서 펼쳐진 시민 퍼레이드 '평화를 향한 걸음'이었다. 지역 예술가, 동아리, 학생 등으로 구성된 36개 단체 2천300명이 앞장선 가운데 시민들도 열정적으로 동참해 즐거움을 함께 나눴다. 프로그램 명칭 그대로 시민 모두가 주인공이 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퍼레이드의 대표 퍼포먼스는 화정문화광장에서 진행된 '행주대첩 재현 왜군박 터뜨리기'였다. 광장 양쪽에 세워진 박 모형의 왜군에게 참가자들이 오자미를 던져 터뜨리는 이벤트였다. 사회자가 "왜군을 물리쳐라! 하나, 둘, 셋!" 하며 장군처럼 준엄한 공격 신호를 보내자 참가자들은 신나게 오자미 세례를 퍼부으며 스릴과 쾌감을 만끽했다.
퍼레이드 도중에는 풍물놀이, 전통무용, 패션쇼, 태권도 시범 등 각종 거리 공연과 이벤트가 동시다발로 펼쳐져 축제의 흥을 한껏 돋웠다. 여성 무용단의 화려한 화관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이은서(8) 양은 "천사님들 같아요. 너무너무 이뻐요! 이렇게 꽃선물까지 주시니 더 좋아요!"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린이들의 플래시몹에 갈채를 보내던 시민 임한재(69) 씨도 "모두가 하나로 어울리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축제의 피날레는 덕양구청 앞 도로 특설무대와 어울림누리 주제광장 특설무대에서 각각 진행된 시민퍼레이드 뒤풀이마당 '전통춤극 <명무전>'과 '고양시민가요제', 그리고 행주산성 행주무대에서 펼쳐진 '고양 전통민속놀이 한마당'이 장식했다.
이 중 14개 단체, 400여 명이 참가한 전통민속놀이한마당에서는 마을 곳곳에서 전승된 민속놀이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 공연자와 관람객들은 손에 손잡고 무대를 돌며 대동한마당을 연출했다. 북장단에 몰입한 국사봉풍물패보존회 김희자(59) 씨는 "역사적 행주대첩 현장에서 모두가 한데 어울리니 기쁨도 더 커진다"고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참가자들과 더불어 겅중겅중 춤추던 이승엽 고양문화원 원장은 "민속놀이한마당을 이곳 행주산성 축제장에서 마련하기는 올해가 처음"이라면서 "내년에는 더 멋지고 신명 나게 꾸며보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이번 문화제 기간에 행주산성에서 '달빛야행축제'가 함께 진행돼 보고 즐기는 기쁨을 배가시켰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가 '행주산성 달 비치다'라는 슬로건으로 마련한 야행축제는 행주대첩을 6가지 주제의 빛 이야기로 풀어냈다. 행주산성의 경관, 시설물 등에 빛을 입히고 일루미네이션, 야간 포토존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행주대첩비에서 진행된 권율 장군의 미디어 파사드 쇼는 행주대첩을 환상적 빛의 예술로 재현해 감탄을 자아냈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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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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