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 없는 현대미술…성별 규범에 '균열' 내는 정치학 돼야"

입력 2018-11-18 11:07  

"상상력 없는 현대미술…성별 규범에 '균열' 내는 정치학 돼야"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상'展서 여성국극 10년 작업 전시하는 정은영
"성별 규범 깨는 게 목표…옛 배우들에게 연대감·삶의 존엄 느껴"
여성국극 오늘에 비판적 주제의식…"단순한 상찬 않으려 했다"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붉은 복도를 지나 푸른 장막을 걷고 들어간 '극장'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진한 화장을 한 미소년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상영 중인 정은영 작품 '유예극장' 주제는 1950년대 전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이다. 여성만 출연할 수 있는 여성국극에서는 남장한 여자들이 이몽룡으로, 아사달로, 서동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유예극장' 표현을 빌리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까꾸러졌다'.
이름도 희미해지다시피 한 여성국극을 10년째 파고드는 이가 정은영 작가다. 그는 2008년 가을 문화연구를 하는 선배를 따라 여성국극 공동체에 발을 들였다. "몸이 불편한 병상 할머니가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모습에 매혹됐다." 할머니는 여성국극 최고스타였던 조금앵(1930∼2012)이었다.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로 2013년에는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올해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거머쥐었다. "현대미술 형태를 빌어 사라져가는 전통예술을 다룬다는 점, 성 정체성 위치를 무대 예술로 풀어낸 점이 돋보였다."(수전 코터 '올해의 작가상' 심사위원장)



매일 새로운 작가와 작업이 출몰하는 현대미술계에서 정은영이 꼬박 10년간 여성국극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서사가 주목받는 시대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해도, 손꼽히는 미술상들은 왜 연이어 정은영을 호명했을까.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작가를 최근 미술관에서 만났다.
"우리 세계에 팽배한 성별 규범을 깨는 것이 제 작업 목표에요. 사람들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다시 정립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면서 성별 규범만큼은 늘 보수적이고 고답적인 자세를 취해요. 현대미술이 여성을 그려내는 모습 또한 보수적이고 상상력이라고는 없죠."
여성이 무대에서만큼은 완전히 남성이 되는 여성국극에 매료된 이유다. 이는 단순히 여성·남성으로 못 박을 수 없는 또 다른 성이라는 점에서, 여성국극 배우들은 근대 국가의 이분법적 성 규범에 '균열'을 낸 살아있는 증거였다.
작가는 "우리는 여성이 남성을 자유자재로 연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배우지 않느냐"라면서 "그러나 여성국극 배우들은 성별을 바꿔가며 연기하는 것에 거부감도, 삶과의 분리감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용맹하게 싸우다 무대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친 일이 있었는데, 내가 8개월 차 임신부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는 조금앵 고백과 같은 '생생한' 재료들은 작업에 큰 도움이 됐다.



작가가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이어온 데는 왕년 배우들에게서 느낀 '삶의 존엄'도 컸다고 했다. 이는 "성별 규범이고 현대미술이고 역사고 무엇이고 작업 목표까지 잊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제게 모든 이야기를 허물없이 들려주시는 선생님들에게 이유를 여쭤보니 '너도 예인이잖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시대에 기생 혹은 딴따라로 취급받으며 예술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을 이들이 그렇게 말해주는 순간, 예술인으로서 연대감이 생겨났습니다."
여성국극이 폐기될 상황에 몰리자, 자신의 예술이 폄훼될 것을 우려해 아예 다른 일을 시작했다는 옛 배우들 고백에서도 작가는 비슷한 존엄을 느꼈다고 했다.
신작 6점을 포함해 11점으로 구성된 MMCA 전시는 정은영 작업이 옛것을 향해 마냥 아쉬움을 늘어놓는 식의 신파조가 아님을 보여준다. 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며 여성국극을 배척한 남성 중심 문화예술을 비판하는 데만 치중하지 않는다.



'유예극장'에는 여성국극에 도전한 배우, 전통가곡 이수자 등 젊은 공연예술인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여성국극이 왜 살아남지 못했는지 정반대 분석을 내놓으며 관람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단순히 상찬·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성국극이 왜 전통문화 정립이라는 국가적 기획에서 탈락하면서 더 나아갈 수 없었는지, 왜 성별 규범 파괴가 장르적인 것에 멈춰져 버렸는지 그 이유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이러한 주제의식 심화는 현대미술관이 5년 전 에르메스재단에 이어 정은영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은영은 내년도 베네치아비엔날레(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에서 김현진 예술감독과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 작가와 함께 한국관 전시를 꾸민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완전히 배제된 여성 서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다.
작가는 "여성국극은 제 예술에 하나의 밑거름, 제가 어떠한 서사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바탕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미술이라는, 어쩌면 많은 사람이 우리 일상과 유리돼 있다고 믿는 예술이 견고한 성별 규범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작가는 야무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걸 믿는 것이죠. 미술은 단지 미학적만이 아닌, 동시대적으로 균열을 내는 정치학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믿어요. 현대미술이 정치학으로서 구동되지 못한다면 미술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aira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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