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⑩울산 3대 성지 언양·병영·남창

입력 2019-02-23 06:00  

[3·1운동 유적지를 가다] ⑩울산 3대 성지 언양·병영·남창
1919년 4월 초 천도교인·청년·문중이 차례로 만세 시위
병영 4·4 만세운동은 축구 경기로 위장…일제가 쏜 총에 4명 순국



(울산=연합뉴스) 김용태 기자 =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한 달 뒤인 4월 초 울산에서도 이어졌다.
울산의 만세운동은 뒤늦은 시기에 불붙었지만, 3개 지역에서 극렬하게 전개됐다.
4월 2일 울주군 언양읍, 4월 4일 중구 병영동, 4월 8일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에서 차례로 만세운동이 벌어져 교인, 학생, 주민, 상인, 지역유지 등이 일제에 맞섰다.
◇ 천도교인 중심의 언양 4·2 만세운동
울산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울주군 언양읍이다.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것은 천도교 신자들이었다.
1919년 서울에 머물던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의 3·1운동 소식과 고종 독살 기사가 실린 국민회보와 독립선언문을 언양에 보내왔다.
이에 천도교인 이규장이 서울로 올라가 김교경으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천도교인들은 4월 2일 언양 장날을 만세 시위 날로 정하고 비밀리에 사람을 모았다.
또 상남면사무소의 등사판을 몰래 훔쳐 독립선언문을 찍고,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장날을 맞아 언양 주변 각 면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천도교인들은 오전 11시에 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알리며 장터를 돌아다녔다.


한편 만세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감시 대상으로 삼았던 한 청년을 체포해갔다.
이를 계기로 2천여 명의 사람이 독립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이 주동 인물들을 언양주재소로 강제 연행한 후엔 주재소로 몰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언양 성터 위에서 가해진 일제의 무차별 사격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만세 시위 참가자 중 17명이 다치고 26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체포된 사람 중 16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0명은 태형 90대를 맞는 고초를 겪었다. 김낙수 씨는 옥중에서 숨졌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소요사건상황'에는 '언양 읍내에서 700여 명의 군중이 투석, 기타 광포 행위를 감행하였으므로 발포해 진정시켰다'고 기록돼 있어 만세운동을 단순 소요 사태로 깎아내리고 있다.
◇ 축구 경기로 위장한 병영 4·4 만세운동
언양에서 울산 최초의 만세 시위가 벌어진 날로부터 이틀 뒤, 병영 지역에서도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서울로 유학을 갔다가 귀향한 청년들로부터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준비해 4월 4일 장날에 거사를 치르기로 계획했다.
4일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모인 학생들과 병영청년회 회원들은 위장 축구 경기를 열고, 축구공을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병영청년회 회원들과 일신학교 학생들은 서동, 남외동, 산전마을 등 병영 지역을 돌며 독립을 요구하는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면서 물리적인 충돌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14명이 연행됐다.
청년들은 다음 날인 5일 다시 일신학교 근처에서 사람들을 모은 뒤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경찰주재소로 행진해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주민 등의 참여로 1천여 명까지 늘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포위하자 일제는 실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엄준·주사문 씨가 사망했고, 문성초·김응룡 씨가 중상을 입어 치료 중 숨졌다.
이날 시위로 검거된 40여 명은 6개월에서 2년의 징역형을 받거나 태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출옥한 이들은 기미계라는 조직을 만들고, 일제 치하에서도 매년 4월 희생된 4명의 추모제를 지내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또 광복 후에는 봉제회를 조직, 영모각을 수리해 삼일사라고 이름 붙인 뒤 4명의 위패를 모셨다.
◇ 학성 이씨 문중이 주도한 남창 4·8 만세운동
남창 만세운동은 당시 울주군 온양면과 웅촌면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울산의 대표적인 유림인 학성 이씨 문중 원로들이 주도했다.
1919년 문중의 문장인 이재락 씨가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3·1운동을 목격했다.
이씨는 울산으로 돌아와 문중 사람들에게 독립선언문과 3·1운동 소식을 전했다.
학성 이씨 문중 원로 8명은 4월 8일 남창리 장날에 맞춰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심했다.
마을 청년들도 거사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 당일 장에 장꾼들이 모여들자 오후 4시께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시작됐다.
수백 명의 장꾼도 호응해 만세를 연호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수락, 이쾌덕, 이용락, 이중걸, 고기룡 씨 등 12명을 체포하고 총을 쏘며 시위대를 흩어놓았다.
체포된 사람 중 8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유림의 문중 원로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남창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 매년 재현되는 울산의 만세운동
울주청년회의소와 중구문화원, 남울주청년회의소는 매년 지역별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날에 맞춰 재현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
재현 행사 참가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진 장소를 시가행진하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친다.
또 만세 시위를 벌이는 주민·학생들과 이를 제지하는 일제 경찰이 출연하는 연극 공연이 현장에서 펼쳐져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yongtae@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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