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35)'밀정' 피살 항일무장투쟁가 박용만

입력 2019-02-26 06:00   수정 2019-02-26 06:25

[3ㆍ1운동.임정 百주년](35)'밀정' 피살 항일무장투쟁가 박용만
미국서 최초의 근대 군사학교 한인소년병학교·대조선국민군단 창설
"'외교노선' 주창 이승만과의 노선차로 최고 무장운동가 연구 부진…피살 진상 밝혀져야 "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재미교포들 사이에서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 항일운동가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1881∼1928)이다.
그는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1864∼1951),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1878∼1938),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1875∼1965) 등과 함께 초기 미주 한인 교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직접 미국 현지에 군사학교까지 설립하며 항일무장투쟁론과 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창했다.
그러나 '외교노선'을 표방한 이승만과의 노선 대립, 일제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아 의열단원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그에 대한 자료나 연구는 많지 않다.
강원도 철원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박용만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일본에서 박영효(朴泳孝·1861∼1939)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쌓으며 활빈당(活貧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귀국 직후 체포되면서부터다.
몇 달 후 출옥한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보안회(輔安會) 등에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다가 또 투옥된다. 이 때 감옥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동지가 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1904년 박용만은 개신교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후 경술국치 바로 전 해인 1909년 미국 내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 소재 한인농장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웠다.
소년병학교는 박용만이 한평생 추구한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방략의 일부인 군인 양성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이어 하와이로 이주한 그는 1914년 하와이 카훌루이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했다.
박용만은 미주지역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항일무장투쟁론을 폈으며, 1911년부터는 '무형국가론'을 펴며 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창했다.
그의 이런 주장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거쳐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박용만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연해주에서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외무총장(지금의 외교부 장관에 해당)으로 선임됐으나, 대통령이던 이승만과 견해 차이가 컸기 때문에 부임하지 않고 중국 베이징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등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는 인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했다. 그는 베이징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1921년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과 함께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해 무장투쟁단체의 통합을 시도하고 연해주에서 대조선국민군의 조직활동을 벌였고 농장 경영을 통한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도 꾀했으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는 연해주와 중국 등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 이해명(李海鳴)에 의해 변절자로 몰려 암살됐다. 일제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았던 점과 군자금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적인 피살 배경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전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무덤이나 유골조차 어떻게 됐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성대 크리에이티브인문학부 조규태 교수는 박용만이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기 위해 재(在)하얼빈 일본총영사관의 편의 제공을 받은 것이 친일파라는 의심을 받게 된 빌미였다고 설명했다.





한국교원대 연구교수인 김도훈 박사는 박용만의 생애, 민족운동,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는 1910년대 한국 민족운동의 흐름과 전략이 어떻게 수립되고 전개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박용만이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아오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외교적 수단을 통한 독립을 강조했던 이승만과 달리 무장투쟁 방식을 줄곧 고집해 갈등이 첨예화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용만과 이승만이 노선투쟁으로 결별해 대립하는 라이벌 관계가 되었고, 이로 인해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치하에서 독립운동가 박용만에 대한 평가는 물론 연구 작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김 박사는 "박용만은 근대적 군대 개념인 대조선국민군을 한국 최초로 조직한 데다 무형국가론 등으로 임정 건설의 초석을 놓고 이런 인식을 확산시키는 등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며 "대조선국민군은 함경도 등지에 국내 지부까지 둘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박용만 피살의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가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의심은 오해로 보인다며 암살 동기가 이승만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류파와 대립한 그의 정파 노선 차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용만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 정확한 피살 배경 등을 밝혀내는 게 연구자들의 과제이지만 자료 부족 등으로 국내 학계에서도 아직 확고한 견해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은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박용만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항일무장투쟁론자"라며 그가 억울하게 뒤집어쓴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duckhw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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