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37) 독립유공자 10명 배출 임청각 복원

입력 2019-02-28 06:00   수정 2019-02-28 06:39

[3ㆍ1운동.임정 百주년](37) 독립유공자 10명 배출 임청각 복원
아버지, 아들·며느리, 손자까지 항일투쟁…노블레스 오블리주 상징
민족정기 되살린다…500년 임청각 280억원 들여 옛 모습 그대로



(안동=연합뉴스) 김효중 기자 = 경북 안동시 법흥동 고성이씨(固城李氏) 종택인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
올해로 500년 된 아흔아홉 칸짜리 살림집임 임청각은 항일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유공자 10명이 나온 곳이다.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고성이씨 종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 이런 말을 남기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일가족과 함께 임청각을 팔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일제는 임청각을 가만두지 않았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일제가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의 집"이라며 마당을 가로질러 철길을 놓고 원형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임청각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를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언급하며 다시 이목을 끌었다.
올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청각의 옛 모습을 찾는 일이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가 소중한 문화재이자 애국 성지인 임청각을 철저한 고증 등을 거쳐 복원하기로 한 것.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중략)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
석주 선생이 만주로 망명하며 남긴 '거국음'(去國吟·조국을 떠나며 읊는다)이란 시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학문을 계승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선생의 문하생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가야산에서 박경종과 함께 의병을 키우기 시작했고 의병장 권세연, 이강년 등이 가세했다.
1905년 김동삼, 류인식 등과 대한협회 안동지부를 만들고 협동학교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으로 국민 계몽운동도 벌였다.
그러나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새로운 길을 찾는다. 선택은 만주였다. 단군 성조의 영토이자 고구려 옛 땅으로 광복을 이룰 역사적 배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1911년 1월 노비 문서를 태우고 종택 등 가산을 정리해 친족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떠나기에 앞서 그는 임청각 사당에서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선생은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 이시영 등과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 자녀 교육과 군사훈련을 했다.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약했고 1919년 한족회를 만들어 자치활동에 힘쓰는가 하면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해 독판(督辦·대표)으로 활동했다.
그 뒤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다. 조국 독립을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32년 5월 12일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만 74세 일기로 순국했다. "독립하기 전에는 내 시신을 고국에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선생 뜻은 자손으로 이어져 3대가 혹독한 감옥살이 등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독립투쟁을 했다.
아들 준형, 손자 병화, 동생 상동ㆍ봉희, 조카 형국ㆍ운형ㆍ광민, 종숙 승화에 이어 2018년 손부 허은(1907∼1997) 지사까지 열명이 독립유공자다.
준형은 고향에 돌아왔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세력이 더욱 팽창하자 1942년 아버지의 문집 '석주유고'(石洲遺稿)를 정리한 뒤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치욕만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청각은 석주 선생의 17대조로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이 1519년 지었다. 용(用)자 형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연못 등을 갖춘 독특한 구조와 쓰임새로 건축사에 의미도 크다
정침(正寢:중심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사랑채로 별당형식 정자이며 평면이 정(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다.
본래 99칸이었던 임청각은 일제가 독립운동 성지의 정기를 끊으려고 1941년 중앙선 철로를 놓으며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해 지금은 50여 칸만 남았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안동시는 민족정기를 되살리려 올해부터 임청각 복원·정비에 나선다.


2025년까지 7년 동안 280억원을 투입한다. 철로를 놓기 이전 모습으로 집을 복원하고 이상룡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짓는다. 주차장과 화장실, 소방시설 같은 편의시설도 다시 정비한다.
2017년 11월 임청각 종손과 문중 대표, 전문가, 문화재위원으로 구성된 복원추진위원회가 네 차례 논의하고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거쳐 이를 확정했다. 이상룡 선조인 허주(虛舟) 이종악(1726∼1773)이 1763년 펴낸 문집 '허주유고'(虛舟遺稿) 속 그림인 '동호해람', 1940년을 앞뒤로 기록한 사진과 지적도를 참고해 임청각과 주변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이 목표다.


철로 철거와 이전이 2020년까지라 설계와 토지 매입, 발굴조사를 한 뒤 임청각 주변 사라진 분가(分家·출가한 자식 가옥) 세 채를 다시 짓는다.
사업별로는 기념관 건립 70억원, 토지 매입 70억원, 분가 재건 35억원, 발굴조사 25억원, 편의시설 정비 23억원, 경관 정비 22억원, 기존 가옥 보수·복원 20억원, 설계용역과 기타 비용 15억원을 책정했다.
권영세 안동시장은 "임청각 복원은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다"며 "독립운동과 나라 사랑 정신을 전하는 역사 배움터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kimh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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