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베네수엘라] ① 어쩌다 이 지경까지…석유 '축복이 저주로'

입력 2019-03-07 10:00  

[혼돈의 베네수엘라] ① 어쩌다 이 지경까지…석유 '축복이 저주로'
석유 의존 경제에 저유가 '직격탄'…국가 통제 경제로 자력 기반 붕괴
美 경제제재, 위기 부채질…곳간 비어가는데도 무상복지 지출 유지

※편집자주 = 최근 수년 사이 중남미에서는 한때 대륙을 휩쓸었던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물결)가 퇴조하면서 우파 국가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로 중남미 좌파를 호령하던 베네수엘라는 '한 나라 두 대통령'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정국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사회적 위기의 원인 진단, 베네수엘라 위기가 중남미에 미치는 영향, 중남미 우파의 약진 현황과 배경 등을 3꼭지로 나눠 짚어봅니다.




(카라카스=연합뉴스) 국기헌 특파원 =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두 번째 6년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이 지난 1월 23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연단에 오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자신을 과도 정부의 '임시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작년 5월에 치러진 대선이 야당의 유력 후보들이 가택연금이나 해외 도피 등으로 출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공정하고 불법적으로 치러졌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헌법 규정상 대통령 유고 시 국회의장이 과도 정부의 임시 대통령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선언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베네수엘라 국민은 너무 오랫동안 불법적인 마두로 정권으로부터 고통을 겪었다. 나는 오늘 과이도를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 주요국,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 중남미 우파 정부 등 50여 개국이 과이도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면서 '반(反) 마두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해 중남미 좌파 진영의 맥을 잇는 쿠바와 볼리비아 등이 '마두로 지키기'에 나서면서 사상 초유의 베네수엘라 '한 나라 두 대통령' 사태는 중남미를 넘어 국제사회의 좌우 대립 양상으로 번졌다.



◇ 석유의존 경제에 저유가 '직격탄'…美 경제제재로 설상가상
"석유는 검은 금이 아니라 악마의 배설물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창립 주역 중 한 사람인 베네수엘라인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는 오래전부터 석유가 지닌 위험성을 이처럼 경고했다.
석유 수출에 따른 경제성장 혜택이 일부 정치인, 군, 기업 등 소수 기득권층에게만 집중되고 석유 수출에만 의존한 탓에 경제 다변화와 자급자족 기반을 갖추지 못하는 폐해를 경고한 것이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 경제는 1920년대에 석유개발이 본격화된 후 국제유가 변동에 종속되는 구조로 전환됐다.
석유산업이 국가 수출의 96%, 정부 수입의 60%를 차지할 정도를 석유 수출 대금으로 식품과 각종 생필품, 공산품을 수입하는 기형적인 '석유 의존형' 경제구조가 형성됐다.
이런 경제구조 속에 2014년 이후 국제유가가 급락하자 베네수엘라에 '석유의 저주'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13년 마두로가 대통령에 처음 취임한 이후 6년간 베네수엘라 경제는 쇠퇴를 거듭해 규모가 '반 토막'이 났다.
경제성장률은 2014년부터 5년 연속 곤두박질쳤다.
2014년 -3.89%를 기록한 경제성장률은 2016년 -16.46%, 2018년 -18%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베네수엘라 경제 침체는 일차적으로 국가경제의 '대동맥'에 해당하는 석유산업의 추락과 함께 일어났다.
국제유가가 하락한 가운데 원유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돈줄이 막혀 버렸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취임 전년도인 1998년 하루 300만 배럴을 웃돌던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은 2018년 11월 110만 배럴까지 감소했다.
베네수엘라산 석유는 불순물이 많아 채산성이 낮은 중질유이지만 호황 시절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시설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미국의 경제·금융 제재도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를 부채질했다.
미국은 민주주의 훼손을 이유로 그간 베네수엘라 정부와 국영 석유 기업 PDVSA가 발행하는 국채의 미국인 구매 금지, 베네수엘라 정부가 제재를 피하려고 만든 가상화폐 '페트로'의 미국 내 거래 금지, 정부 핵심 인사의 미국 내 자산 동결과 금융 거래 금지 등의 제재를 가했다.
최대 결정판은 과이도 의장의 임시 대통령 선언 이후 취해졌다.
미국은 2월 28일 베네수엘라의 '돈줄' 역할을 하는 국영 석유 기업 PDVSA를 상대로 미국 내 자산 동결과 송금 금지 등의 제재를 가했다.
이 제재는 미국이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취한 제재 중 가장 강력한 조치로, 마두로 정권의 '돈줄'을 차단하고 과이도 의장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목적 아래 취해졌다.
미국은 압박을 늦추지 않고 있다.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6일 마두로 정권의 불법거래와 자금조달을 돕는 외국 금융기관을 제재하겠다고 경고했다.
이 때문에 마두로 정권은 미국의 각종 경제제재로 300억 달러(약 33조8천억원)가 넘는 손실이 발생, 국민의 생활고가 더욱 악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석유 이권을 노리고 베네수엘라 보수 기득권층과 결탁해 벌인 '경제 전쟁' 탓에 나라 경제가 힘들어졌다는 게 마두로 정권의 항변이다.
미국 진보매체인 더 네이션은 최근 '트럼프의 다른 국가비상사태 : 베네수엘라인을 죽이는 제재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제재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가장 최근에 가한 미국의 제재가 계속된다면 인도주의적 위기가 급속도로 심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데도 고유가 시절의 무상복지를 유지한 점도 현재 베네수엘라가 처한 위기의 또 다른 요인으로 거론된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1999년 대통령 취임 후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석유로 벌어들인 재원의 상당 부분을 16년간 빈민층에게 무상 교육·의료와 저가 주택 등을 제공하는 데 썼다.
복지정책 강화는 차베스 전 대통령이 취한 대중영합적 좌파 노선을 뜻하는 '차비스모'(Chavismo)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마두로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 지출 비중이 2000년 28%에서 2017년 41%로 높아졌다는 사실은 마두로 대통령의 정책적 실패를 잘 보여준다.
석유 에너지 산업과 민간 기업의 국유화와 국영기업의 비효율성, 만연한 부패, 가격 및 외환 통제 정책 등 정부가 시장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경제 활력이 저하된 점 역시 경제 위기를 악화시킨 다른 요인으로 분석된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물가는 이미 서민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인적인 수준이다.
베네수엘라 국회가 지난 1월 9일 발표한 2018년 물가상승률은 169만8천488%에 달한다.
마두로 정권이 작년 8월 초인플레이션을 타개하려고 자국 통화인 볼리바르를 100,000대 1로 액면절하 하는 화폐개혁안을 발표했지만 고삐 풀린 물가를 잡기에는 역부족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물가상승률이 1천만%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한다.
IMF가 물가상승률 전망치로 제시한 '1천만%'는 현대 경제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든 수준이다.
훌리오 세사르 피네다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 교수는 "경제 위기는 우고 차베스 전 정권 때 씨앗이 뿌려졌고 마두로 현 정권 들어서면서 최악의 현실로 나타났다"면서 "석유 재정 수입을 기본 산업 경쟁력 강화을 위한 투자에 쓰지 않아 오늘의 난국이 온 것"이라고 진단했다.


◇ 날개 없는 추락…국민은 '굶고' 세계 최악 치안에 '벌벌'
과이도 의장의 임시 대통령 선언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임시 대통령 선언의 단초는 2015년 12월 실시된 총선에서 우파 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마련됐다.
야권은 이듬해 마두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고 국민소환투표를 추진했으나 친정부 인사들로 구성된 선거관리위원회 등의 방해로 실패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2017년 자신을 향한 야권의 퇴진 압력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정권 유지와 장기집권 토대를 마련하려고 의회를 무력화하는 제헌의회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도 개헌 등 무소불위의 권한을 지닌 제헌의회는 같은 해 7월 출범했다.
당시에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자가 120명이 넘는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나면서 극도의 정국 혼란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마두로 대통령은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장기집권 토대를 쌓은 마두로 대통령은 작년 5월 대선에 출마, 68%의 득표율로 여유 있게 승리했지만, 야권과 국제사회는 공정성이 결여된 선거라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친정부 성향의 제헌의회가 지지율이 급감하는 마두로 대통령에게 유리하도록 선거 일정을 앞당기고 유력 후보들이 가택연금이나 수감 등으로 출마할 수 없도록 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야권의 분열 속에 온건 성향의 야당 후보가 출마했지만 마두로 대통령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결국 지난 1월 10일 마두로 대통령이 두 번째 6년 임기를 시작하자 과이도 의장을 전면에 내세운 야권은 정권 퇴진 운동의 불씨를 되살렸고 임시 대통령 선언이라는 강수를 뒀다.
베네수엘라를 옥죄는 경제 위기는 국민의 삶을 짓눌렀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재정 수입이 줄어들자 이전만큼 식품과 생필품 등 기초 생활물자를 대량으로 수입할 수 없게 됐다.
그나마 일부 식품과 생필품이 암시장에서 유통됐지만, 턱없이 비싼 비공식 환율로 거래되는 바람에 일반 국민은 감히 구매할 수 없는 실정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지난 1월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달러 환율에 맞추려고 볼리바르화의 가치를 달러당 3천200 볼리바르로 고정했다.
공식환율과 암시장 환율을 맞추는 고육지책을 내놨지만 물가는 여전히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안드레스 베요 가톨릭 대학, 중앙대학, 시몬 볼리바르 대학 등 3개 대학의 공동연구 결과를 보면 베네수엘라 전체 가구의 80%가 음식 부족 위험에 처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인구의 90%는 음식을 살 수 있는 충분한 소득이 부족하며, 전체 가구의 절반이 음식과 물 부족 등의 상황에 부닥쳐 있는 이른바 '다차원적인 빈곤' 상태인 것으로 분석됐다.
식량난이 장기화하면서 지난해 베네수엘라 국민의 64%가량이 극심한 식품 부족으로 체중이 평균적으로 11㎏ 줄어든 것으로 보고됐다.
수입에 의존하던 의약품과 의료장비가 부족해지면서 보건 의료 체계 역시 무너졌다.
영아와 산모 사망률이 늘었으며 말라리아, 홍역 등의 감염자 수도 급증했다.
신경계통 질환을 앓고 있는 다마리스 마리요(45)는 "미국 등이 지원한 인도주의 원조 물품에 내가 앓는 질환의 치료 약이 있었지만 반입이 좌절됐다"면서 "너무 필요하고 소중한 약품인데 구호품을 싣고 국경을 넘으려던 트럭이 불에 타버려서 슬프고 비참하다"고 말했다.
정치·경제 위기 속에 치안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현지 시민단체인 '베네수엘라폭력감시단'(OVV)이 공개한 연례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인구 10만명 당 살인사건 발생률은 81.4건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세계은행이 2016년 기준으로 집계한 베네수엘라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인구 10만명당 56건으로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에 이어 세계 3번째로 높다.
penpia21@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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