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1천일…여전히 둘로 나뉜 영국

입력 2019-03-21 06:01  

[르포]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1천일…여전히 둘로 나뉜 영국
런던 의사당 인근서 연일 브렉시트 찬반 시위 열려
생필품 사재기 등은 발견하기 어려워…영국 거주 EU 시민들 심경도 복잡



(런던=연합뉴스) 박대한 특파원 = 20일(현지시간) 점심시간이 막 지난 오후 영국 런던. 의회 의사당 건물 인근 '웨스트민스터'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구름이 잔뜩 낀,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는 전형적인 영국 날씨 속에 행인들이 분주히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의사당 건물을 끼고 모퉁이를 돌자 경찰이 차량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도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도로 양편에는 서로를 마주 본 채 각기 다른 시위대가 집결해 있었다.
한쪽에서 "지금 당장 브렉시트를"(Brexit now)이라고 외치자, 반대편에서는 "브렉시트는 안된다"(Brexit No)라며 응수했다.
이날 오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도날트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에 서한을 보내 당초 29일로 예정됐던 브렉시트를 6월 30일까지 3개월간 연기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앞서 영국은 지난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 이른바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브렉시트를 결정한 지 1천일이 지난 이날 브렉시트 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날 도로 양편의 시위대는 여전히 브렉시트가 영국 내 정치권은 물론, 사회 전반의 분열과 혼란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 브렉시트 영향 엇갈린 시각…연기 요청은 한 목소리로 비판
아직 EU 승인 절차가 남았지만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물론 반대론자들도 이날 정부의 브렉시트 3개월 연기 요청 결정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다.
브렉시트 찬성 시위에 참석한 미셸 씨는 "브렉시트 연기는 시간 낭비다. 메이 총리의 합의안은 '나쁜 합의안'(bad deal)이기 때문에 EU 탈퇴 지지자, 잔류 지지자 모두가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며 "브렉시트 시점을 연기한다고 해서 '나쁜 합의안'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미셸 씨는 "영국 국민은 이미 EU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면서 "정치인들이 책임감 없이 이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평생 어떤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운명을 결정할 브렉시트를 앞두고서는 가만있을 수 없어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반면 브렉시트 반대론자인 브라이언씨는 "단순히 연기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왜 연기하는지가 핵심"이라며 "다시 한번 국민투표를 열어 브렉시트에 대한 국민 의사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이언 씨는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을 비롯한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2016년 국민투표 당시 많은 거짓말을 했다. 당시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 측은 법에 정해진 선거 지출규정 역시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왜 브렉시트를 반대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기본적으로 브렉시트가 내 손자들의 삶을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유럽 어디든 원하는 곳에 살 수 있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며 여행하는데 별도 제한도 없지만 브렉시트 이후에는 이 모든 것이 갑자기 중단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브렉시트 반대 시위자인 샐리 씨는 "2016년 국민투표 당시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갖지 못했었다"면서 "그동안 우리는 브렉시트가 정말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를 더 잘 알게 됐다. 제2 국민투표를 다시 열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서도 시각은 엇갈렸다.
미셸 씨는 "브렉시트를 앞두고 있지만 영국 경제의 실업률은 사상 최저, 고용률은 사상 최고 수준"이라며 "영국 경제가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성장률이 낮을 순 있지만 EU 내에서는 괜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브라이언 씨는 "브렉시트 이후 일자리 감소 등 경제 충격은 불가피하다"면서 "런던은 그동안 국제금융센터 역할을 했지만 브렉시트 결정 이후 이미 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옮겨가고 있다.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치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브렉시트 찬성 시위에 참여한 로버트 씨는 "메이 총리는 3월 29일 브렉시트를 단행하기로 약속해왔다"면서 "이를 지킬 수 없다면 사임하고 EU와 협상을 잘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총리를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샐리 씨는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는 괜찮은 사람이지만 브렉시트와 관련해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왔다"고 비판했다.



◇ 영국 내 EU 회원국 주민들도 불확실성에 빠져
의사당 인근 도로에서 열리고 있는 팽팽한 브렉시트 찬반 시위와 달리 런던 교외에서는 브렉시트를 앞둔 혼란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런던 남서쪽 주거지역인 서비튼에 위치한 대형마트인 세인스버리에서 만난 앨리슨 씨는 2016년 국민투표에서 EU 잔류에 표를 던졌다고 했다.
그녀는 "브렉시트를 연기하다 보면 '노 브렉시트'로 갈 수도 있기 때문에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다"면서 "영국인들은 정치에 대한 믿음이 강한 편이다. 정치권이 더 나은 방향으로, 더 적은 손실을 위한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메이 총리의 정책에 반대하지만 그녀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일부 언론에서 '노 딜' 브렉시트를 앞두고 생필품 사재기 등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이날 세인스버리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다.
앨리슨 씨 역시 주변에서 생필품 사재기에 나선 이들은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브렉시트는 비단 영국인뿐만 아니라 영국 내 거주하는 EU 회원국 주민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폴란드 국적으로 10여년 전 영국에 건너온 파벨 씨 가족이 대표적이다.
다국적 정보기술(IT) 기업 소속 엔지니어로 일하는 파벨 씨는 영국에서 둘째 아들을 가졌다.
이미 5년 이상 영국에 거주하면서 영주권 신청 자격을 얻은 파벨 씨는 아직 영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영국 내에서는 브렉시트 이후 거주권한 등과 관련해 EU 회원국 주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앞서 영국 정부는 지난해 6월 브렉시트 이후 영국 거주를 원하는 EU 시민의 구체적인 등록절차와 요건 등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영국에 사는 EU 주민이 2021년 이후에도 영국에 머무르려면 늦어도 2021년 6월 말까지 등록절차를 거쳐야 한다.
EU 공식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2016년 1월 기준 320만명의 EU 주민이 영국에 거주한다.
파벨 씨는 아예 10년 넘게 산 '제2의 고향'인 영국을 떠나 스페인으로 이주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파벨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늘면서 지난해 9월까지 1년간 EU로부터의 순이민자수는 5만7천명으로 2009년 이후 최소를 기록했다.
특히 2004년 EU에 가입한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 등 8개 중·동유럽 국가 국적자 중 3만8천명이 영국에 들어왔지만 5만3천명이 떠나면서 순유출을 기록했다.
런던 교외 이셔주에 사는 찰스 씨 가족이 브렉시트를 바라보는 심정도 복잡하다.
찰스 씨는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이지만 아내인 데프니 씨는 니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그들의 첫째 자녀인 아들은 프랑스 국적, 둘째인 딸은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데프니 씨의 출산 당시 상황과 행정절차 때문에 엇갈린 국적을 가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직은 브렉시트 이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찰스 씨는 혹시나 다른 국적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할지 지금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비단 찰스 씨 가족뿐 아니라 영국인 중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거나 이를 검토하는 이들은 급증하고 있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Eurostat)에 따르면 다른 EU 회원국 국적을 취득한 영국인은 지난 2016년 6천555명에서 2017년엔 1만4천911명으로 127%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다른 나라 국적 취득자가 갑자기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사상 초유의 EU 회원국 탈퇴 실험인 브렉시트는 3년이 다 돼가도록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영국과 유럽 국민들의 삶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 역시 짙어지는 양상이다.


pdhis9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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