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눌러쓴 세상이야기…김훈 산문집 '연필로 쓰기'

입력 2019-03-29 06:01  

연필로 눌러쓴 세상이야기…김훈 산문집 '연필로 쓰기'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여전히 원고지에 육필로 원고를 쓰는 우리 시대의 몇 남지 않은 작가, 김훈.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으로 거장 반열에 든 그가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를 출간했다.
이번 산문집에는 작가가 그간 한겨레신문 등에 싣거나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누항사-후진 거리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세상만사에 관한 단상이 엮였다.
2015년 발간된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이후 3년 반 동안 그는 몽당연필을 들고 지우개 가루가 산을 이룰 때까지 원고지 위에 글을 꾹꾹 눌러썼다.
29일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작가는 "일상을 좀더 관심을 갖고 바라본 글들이 실렸다"고 이번 산문집을 설명했다.
"(나이가 드니) 하찮은 것들을 뒤돌아보게 됐어요. 꼭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일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디테일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 산문들은 다 일상적인 것에 대해 쓴 것입니다."
어느덧 70대에 접어든 작가는 그의 글쓰기 인생을 함께한 무기이자 악기, 밥벌이 연장인 '연필'에 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서두' 일부)
이번 신작에서 그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며 슬픔과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오함마를 들고 철거촌을 부수던 철거반원들과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던 엄마들에 대한 유년의 참혹한 기억, 배달라이더들에 대한 이 사회의 처우, 국회의원들이 주고받는 '물타기' 언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담은 글을 비롯해 북한을 생각하며 쓴 몇편의 글에서는 언론인이자 문인으로서 세상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칼보다 강한 펜'을 잡고 살아온 그의 결의가 느껴진다.
특히 작가가 직접 현장에서 취재한 세월호 참사는 그의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예슬이는 엄마의 하이힐을 좋아했다. 예슬이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엄마의 구두를 신고 멋진 포즈로 방안을 걸어 다녔다. (…) 기억교실 안 예슬이의 책상 위에 예슬이 친구 혜정이가 편지를 써놓았다. "예슬아 너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나는 슬프다 / 김혜정"'('살아가는 사람들' 부분)
'죽은 아이의 목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 빛의 폭포처럼 흘러내리던 딸아이의 검은 머리채, 처음으로 립스틱 바르고 깔깔 웃던 입술, 아들이 동네에서 축구하고 돌아온 저녁의 땀 냄새 (…) 이것들은 모두 하찮은 것인가. 이 사소한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그것을 잃고 슬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비로소 안다.'('동거차도의 냉잇국' 부분)
젊은 시절 생애가 다 거덜 날 것 같은 날 술을 퍼마시고 다음 날 아침 배 속이 끓을 때 눈 슬픈 똥에 대한 이야기도 슬며시 꺼내 보인다.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에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밥과 똥' 부분)
'내 마음의 이순신'에서는 내외부의 잔혹한 적의에 둘러싸인 채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이순신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복원한다.
'그가 감옥을 나와서 쓴 첫번째 문장은 "감옥 문을 나왔다"이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 이 문장은 벼락처럼 나를 때린다. 이 문장은, 남한산성 서문의 밑돌처럼 무수한 표정을 감춘 채 무표정하다. (…)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말하여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들끓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내 마음의 이순신 1' 부분)
그런가 하면 함께 늙어가는 친구들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은 '해마다 해가 간다'와 '늙기와 죽기', 주례사를 더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담긴 '꼰대는 말한다' 등은 김훈의 유머가 십분 발휘돼 피식 웃음 짓게 하고 마는 글들이다.
그가 20년째 산책하는 일산 호수공원 풍경을 그린 '호수공원의 산신령', 이제서야 글을 배우는 할머니들 시에서 경건함을 발견한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 등에서는 척박한 사회에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감동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그가 자신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하면서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해 말한' 글이다.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지만, 우리는 그가 원고지 위에 연필로 겨우 쓴 글들을 읽으며 그가 바란 대로 우리 일상을, 주변인들을,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
그는 다음 소설을 조금씩 써 내려 가고 있다. 언제쯤 완성될는지는 그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많은 글을 썼지만, 막상 애착이 가는 글을 물어보니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앞으로 꼭 써보려고 합니다."


bookmani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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