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ㆍ1운동.임정 百주년](66) "벅차고 먹먹한 역사적 사건"(끝)

입력 2019-04-11 12:00   수정 2019-04-11 13:12

[3ㆍ1운동.임정 百주년](66) "벅차고 먹먹한 역사적 사건"(끝)
기획특집 참여 기자 좌담회 …"아직도 미발굴된 인물ㆍ자료 많을 것"
"연합 특집기사 보고 해외 독립 유적지 찾는 한인 발길 조금이라도 늘었으면"
"100주년 맞이 반짝 행사로 끝나선 안 돼…북한과 적극적 학술교류도 필요"


(서울=연합뉴스) 연합뉴스는 독립운동사에서 분수령이 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1월 2일부터 지난 10일까지 총 65회에 걸쳐 100년 전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관련 쟁점들을 분석하고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국내외 역사 유적들을 소개했다.
이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면서 이번 특집기사 작성에 참여한 기자들이 모여 취재 과정의 소회와 향후 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좌담회에는 한반도부 김귀근·문화부 박상현·사회부 황희경·전국부 김대호 기자가 참석했다. 옥철 로스앤젤레스 특파원과 차대운 상하이 특파원은 메일로 의견을 전달했다. (정리 = 박상현 기자)

-- 기사를 쓰면서 들었던 단상이나 소회가 있다면.
▲ 서슬 퍼렇던 일제 치하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 국민이 2개월간 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격스럽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많은 지사들이 이 과정에서 일제 총칼에 스러져 간 사실은 안타깝고 슬프기 그지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위정자와 국민이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한다.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발 빠르게 도입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국민을 노예처럼 핍박한 사실은 너무나 치욕적이다. 조선시대는 양반 중심 사회로 신분차별이 확고했고 남녀차별 또한 심했는데, 독립운동에는 차별받던 하층민과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져 인상 깊었다. 이들이 무엇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가며 만세운동을 벌였을까. 한민족이라는 자존심과 정체성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놓았던 것 같다. 3·1운동 당시 일본은 세계 최강대국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농업 중심 산업 구조에 활과 창, 화승총 등으로 무장한 구식 군대를 보유한 수준이었다. 100년 전 조선과 일본의 국력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고민에 빠졌을 듯싶다. 친일했던 대다수 인사는 조선이 독립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민중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송금하거나 광복군 등에 가담하며 독립운동의 열기를 더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한민족의 위대한 민족정신이 바탕을 이뤘다고 본다. 보수와 진보, 남과 여, 세대 간 갈등이 심화하는 요즘 우리를 다시 하나로 묶어줄 대의명분은 무엇일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처럼 국론이 분열된 상황에서 또다시 누구의 먹잇감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위정자들이 대승적으로 모범을 보여주길 간절히 바란다. (김대호)
▲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란 무게감을 체득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전국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 중국 시안 광복군 활동 유적지부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가 투옥된 뤼순감옥, 하얼빈에 있는 일제 생체실험 현장 등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이때의 체험이 기사 작성의 거름이 됐다. (김귀근)
▲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올해 기념사업 계획을 정리하면서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의 역사가 곳곳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자체는 지역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사업을 많이 준비했는데, 100년 전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독립을 위한 노력이 치열하게 진행됐음을 알게 됐다. 교과서에 실리는 유명 인사들의 노력 말고도 이름 없는 민중의 노력이 더해져 3·1운동과 임정의 성과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황희경)
▲ 1월 이후 많은 연구기관과 학회가 다양한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말은 아직도 3·1운동, 임시정부에 대해 학계 연구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컨대 3·1운동이 일어난 첫날인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상세하게 밝힌 논문이 최근에야 처음으로 발표됐다. 많은 사람이 3·1운동이라고 하면 민족대표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탑골공원에 인파가 운집했다는 식의 단편적 사실만 알고 있을 뿐, 3·1운동이 얼마나 오래 이어졌고 사망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시정부는 3·1운동과 비교하면 학계 관심이 적고, 비판적 시각도 있었다. 한편으로 학술대회에 나오는 학자들 면면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도 느꼈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의 폭이 넓지 않다는 이야기 아닐까. (박상현)
▲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4년 하와이에서 배를 타고 미국 본토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발을 내디딘 뒤 남쪽으로 내려가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던 시절의 발자취를 찬찬히 따라가 봤다. 도산 공화국이라 불린 파차파 캠프가 있던 리버사이드는 LA 동쪽의 아주 낙후된 도시인데, 캠프 자리는 정말 삭막함 그 자체였다. 가스 충전소와 철조망 사이에 덩그러니 '파차파'(Pachappa)라는 현판 하나가 붙어있을 뿐이었다. 바로 옆은 기찻길인데, 100여 년 전 철로 바로 옆에 한인들이 캠프를 이뤄 오렌지를 따면서 품삯을 모아 독립운동 의연금으로 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파차파 캠프는 한 번 이전했는데 옮겨간 곳도 기차역 옆이었다. 당시 한인들의 고단했던 삶이 느껴졌다. (옥철)
▲ 임시정부가 시작된 상하이에서부터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 훈련장인 시안, 조명하 의사의 일본 대장 척살 의거지인 대만 타이중 등 중화권 일대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두루 돌아보았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현장으로 기록된 곳들이지만, 대부분 한국인의 발걸음이 뜸해 아쉬움을 느꼈다. 상하이나 시안, 대만 등은 우리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 곳이다.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특별한 해인 만큼 연합뉴스 기획기사를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대만의 유명 관광지나 맛집을 찾아가는 길에 할아버지를 한 번만 떠올려 달라"는 조명하 후손의 말이 잊히질 않는다. (차대운)

-- 자료를 찾거나 발품을 팔아 작성한 기사가 적지 않다. 취재하면서 경험한 어려움이나 애로사항은 없었는지.
▲ 3·1운동과 관련된 정확한 '팩트'가 없어서 힘들었다. 일반적으로 3·1운동 참가자와 사망자 수를 적을 때는 조선총독부 자료 혹은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활용한다. 하지만 두 자료는 매우 오래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뒤늦게나마 여러 사료를 분석해 참가자와 사망자 수를 집계해 3·1절을 앞두고 발표했다. 이외에도 기사를 작성할 때마다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적지 않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정보를 집대성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면 좋을 듯싶다. (박상현)
▲ 무엇보다 북한 지역에 있는 3·1운동 자료를 얻는 데 애로가 많았다. 아울러 각 지자체에서 보관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제 수형기록 관련 자료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체계적 자료 정리가 필요하다. (김귀근)
▲ 자료 파악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고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산다'는 말을 실감하며 심적으로 불편함을 느낀 것도 컸다. 독립운동가 후손 중에는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 흩어져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독립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친일파의 재산 환수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십 년간 진행된 친일파 보유 재산 환수가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다. (김대호)
▲ 정부가 지난해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런데 위원회는 7월 정식 출범했고 기념사업은 12월이 돼서야 확정됐다. 여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정부가 조금 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념사업을 준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황희경)
▲ 파차파 캠프 취재는 현지 전문가인 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와 동행해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당시 미국 이민국이나 노동국 자료를 접해보지 못한 건 아쉬움이 남는다. 안창호는 세 차례 미국에 드나들면서 출입국 기록이 남았고 초기 미주 한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의 행적을 입증할 만한 자료를 미 이민당국 등에서 찾아내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존재 자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고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주 한인 이민사가 체계적으로 정립돼 있지 않은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다행히 근래에 미주 한인 1세들이 구술 역사 프로젝트를 진행해 독립운동 역사를 육성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의 발자취를 취재하던 도중에 리버사이드 에버그린 묘지에서 이름 모를 한인의 묘비를 찾아내기도 했다. '김순학'이란 분의 묘비인데, 한글로 또렷하게 이름이 쓰여 있었다. 3·1운동이 있던 1919년 마차사고로 비명횡사했다고 하는데, 고인의 직함이 '대한인국민회 회원이자 흥사단 단우'라고 돼 있었다. '아, 그때도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돕던 풀뿌리 같은 분들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옥철)
▲ 중국 독립운동 유적지들의 경우 중국 정부가 전적으로 관리권을 행사한다. 그러다 보니 접근이나 취재 측면에서 어려움이 컸다. (차대운)

--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현재 한국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맨몸으로 총칼에 맞선 민초들의 항쟁과 중국, 만주, 러시아 지역에서 재산까지 헌납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애국지사들의 투쟁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고, 그 결과들이 우리 역사교육에 잘 반영됐는지 전 사회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김귀근)
▲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는 가치들이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거치며 확보됐다. 한반도에서 2천년 가까이 이어진 왕조 역사가 극적으로 전환된 사건이 3·1운동이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서 벗어나려 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민중이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각인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대 조선인들이 지향한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 (박상현)
▲ 미주 한인사회에서 3·1운동, 임시정부를 취재하다 보니 재외교포들이 느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안창호의 날 제정안을 발의한 캘리포니아 주의회 한인 1.5세 최석호 의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창호 데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한인사회에서는 도산을 인도의 국부적 존재 마하트마 간디, 미국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서 킹과 비교하기도 한다. 해외에서도 이럴 정도의 자부심을 가진 만큼 한국 사회에서도 독립운동가의 위상을 더 격상해야 한다. (옥철)
▲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임시정부가 실제로 독립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극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비록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고 때론 심각한 분열로 오랜 침체기를 겪기도 했지만 한 번도 내리지 않았던 독립의 깃발을 유지한 임시정부의 험난했던 역사를 현장에서 돌이켜보면 '독립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차대운)

-- 100주년인 올해가 지나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앞으로 3·1운동, 임시정부와 관련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 올해 반짝 3·1운동과 임시정부 100년의 의미에만 주목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평소 꾸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해외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은 사료들이 발굴됐는데, 이런 사료를 찾아내는 노력을 더 진행하고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황희경)
▲ 남북한 간 3·1운동, 임시정부에 관한 학술교류나 세미나가 절실해졌다고 생각한다. 3·1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우리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북한 지역에 남아 있을 자료를 공유하고 학술교류를 추진해 생각을 모으고 정리해 하나의 역사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작업에는 정부와 학계, 언론이 모두 나서야 할 것이다. (김귀근)
▲ 3·1운동과 임시정부는 한민족의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발생한 부끄러운 역사의 일면이기도 하다.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자라나는 세대에게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지속해서 교육해야 한다. 아울러 관련 유적도 잘 관리해야 한다. (김대호)
▲ 미주 한인사회에 국한해보면 이곳 한인들이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심포지엄, 뮤지컬, 전시회 등 각종 행사를 열고 있다. 다만 그런 시도가 대부분 각 지역 한인회나 한인단체 중심으로 따로따로 이뤄지다 보니 한마디로 구심점이 없다. 정부와 민간이 민관 TF를 만들어 해외 한인사회 조직과 연계해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속해서 전파해 나가면 좋겠다. (옥철)
▲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내 발자취를 더듬어가면서 미국, 중국 등 다양한 국적 출신 외국인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인 광복군' 쑤징허 씨나 일제에 쫓기던 김구의 상하이 탈출과 은신을 도운 미국인 피치 목사 가문, 중국인 지사 주푸청 일가의 얘기를 기사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우리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현행 법령상 외국 국적자인 이들에게 훈장 외에 경제적인 방식으로 감사 표시를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국회에 관련 법령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고 하는데, 향후 정치권에서 전향적인 검토를 하길 바란다. (차대운)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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